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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재즈쿼텟 2023 콘서트
- 서울재즈쿼텟(SJQ)이 돌아왔다. 지난해 해체 25년만의 재회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끝낸데 이어 그 실황을 담은 LP 발매 기념으로 11월 19일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1년 동안 더욱 농익은 멤버들의 호흡이 무대 위에서 폭발했고, 한국형 재즈의 미래를 그린 창작곡으로 신선함을 더했다. 각각 수십년 경력의 거장들은 이번 공연을 통해 확실한 메시지를 던졌다. ‘고여 있기보다 개척하겠다, 계속 걸어가겠다.’ 간결하지만 분명한 메시지였다. 글 l 박은주 기자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 서울재즈쿼텟의 포스터가 다시 걸렸다. 지난해 감동의 재회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반가운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들의 재결합은 ‘1천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운 뒤 앙코르 콘서트까지 이어졌다. 그게 벌써 1년 전이다. 그 동안 서울재즈쿼텟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중략- 서울재즈쿼텟은 앞으로도 다양한 창작곡을 통해 한국의 흥을 더한 K-재즈를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연주력을 갈고 닦은 뮤지션들이 이제는 신로를 개척하겠다고 나섰다.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영화 ‘인턴(The Intern)’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70대의 주인공인 벤이 스타트업에 시니어 인턴으로 지원하며 하는 말이다. “뮤지션에게 은퇴란 없다더군요.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음악이 흐르는 한 멈추지 않는다고요. (I read once, Musicians don’t retire. They stop when there’s no more music in them)” 서울재즈쿼텟의 재즈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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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호·아듀·김성길의 ‘3인 3색 라이브 콘서트’
- 박정호의 관록, 아듀의 흥, 김성길의 감성. 색소포니스트 3인의 다채로운 매력으로 가득했던 ‘엘프와 함께하는 박정호의 3인 3색 라이브 콘서트’가 지난 10월 29일 경기도 파주의 엠파이브 방송센터에서 열렸다. 화려한 출연진과 빈틈없는 구성으로 약 2시간 동안의 공연을 꽉 채운 프로 연주자 3인의 저력이 돋보였던 무대. 그 이모저모를 전한다. 글 l 박은주 기자 가을밤의 축제라는 말이면 충분할까. ‘3인 3색’이라는 콘셉트처럼, 이날의 공연은 색소폰 선율의 다채로운 매력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메인 출연진의 색깔부터 뚜렷했다. 깊이 있는 관록의 연주로 관객을 사로잡는 박정호, 밝은 기운과 긍정의 힘을 전달하는 아듀(강선영·김배정), 섬세한 감성 연주가 무기인 김성길까지. 개성 넘치는 이들의 연주 스타일은 셋 리스트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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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의 경계를 넘어 하나 된, 장인영의 오픈 콘서트
- 장인영 색소폰 ENT에서 주최하는 ‘장인영의 색소폰 오픈 콘서트(이하 오픈 콘서트)’가 11월 19일, 5번째 막을 올렸다. 지난 2018년 첫선을 보인 뒤 신선한 기획과 화려한 출연진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오픈 콘서트는 코로나19로 인한 공백기를 실감할 수 없을 만큼 알찬 구성으로 돌아왔다. 이날 오후 5시, 오픈 콘서트가 열리는 경기도 안산의 보노마루 소극장은 색소포니스트 장인영씨의 공연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공연 열흘 전부터 이미 전석 매진의 기록을 세운만큼, 첫 무대가 시작되기 전부터 기대에 찬 관객들의 열기로 공연장이 뜨거워졌다. 오픈 콘서트는 프로 연주자와 공연을 찾은 관객들이 함께 무대에 서는 콘셉트로,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 기획이 특징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장인영씨와 함께 색소포니스트 석성노·김성길·박근오씨가 무대를 꾸몄다. 아마추어 연주자로는 ▲강관태 ▲김보현 ▲김상곤 ▲김종삼 ▲김향미 ▲류재홍 ▲문지후 ▲윤기상 ▲윤수연 ▲천기갑씨가 출연했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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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남해 이봉조배 색소폰 콘테스트&가요제
- 천재 작곡가이자 테너 색소포니스트 ‘이봉조’를 테마로 그의 고향인 남해에서 색소폰 경연대회와 가요제가 열렸다. 감탄을 자아내는 명연주와 심금을 울리는 곡들로 한국 가요계에 큰 족적을 남긴 뮤지션 이봉조. 그의 유산을 기리기 위해 지난 9월 남해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됐던 ‘제1회 남해 이봉조배 전국 색소폰(앙상블) 경연대회(이하 색소폰 경연대회)’와 ‘제1회 남해 이봉조 가요제(이하 가요제)’의 현장 속으로 함께 가보자. 글 ㅣ 박은주 기자 ‘밤안개’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주옥같은 곡들로 한국형 재즈의 초석을 다진 이봉조의 숨결이 지난 9월 16일과 17일, 그가 태어난 남해에서 되살아났다. 경남 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터라 그를 진주 출신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봉조는 1932년 경남 남해군 창선면에서 출생했다. 수많은 뮤지션을 배출한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폰을 불며 본격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걸었고, 일본 동경 국제 가요제, 그리스 가요제 등 세계적인 대회에서 작곡 능력을 인정받으며 한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이봉조의 음악을 사랑하는 전국 각지의 색소폰 동호인, 그리고 음악 애호가들이 올해 처음으로 개최되는 색소폰 경연대회와 가요제에 참석하기 위해 한데 모였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경연대회는 9월 16일, 가요제는 9월 17일로 나뉘어 열렸다. 참가팀은 총 28개 팀(경연대회 14개 팀·가요제 14개 팀)으로, 두 차례의 예선을 통해 본선에 오른 실력자들이다. 애초 본선 진출 팀으로는 각각 12개 팀이 선발될 계획이었으나, 예선 당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쟁쟁한 실력자들이 대거 참가한 관계로 2개 팀씩 추가 선발됐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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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소폰, 그곳을 가다] 어제보다 오늘 더 빛나는 여청센텀윈드앙상블
- 혼자보다 같이, 돋보이는 대신 조화롭게. 결성 초기부터 앙상블의 이 같은 미덕을 실천해 온 팀이 있다. 색소폰사관학교 부천 분교의 ‘여청센텀윈드앙상블’이다. 이규삼 분교장을 주축으로 운영되는 이 팀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앙상블’이라는 초심을 지켜왔다. 몇 해 전 색소폰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을 도입하며 면학 분위기까지 형성된 덕분에 이들의 앙상블은 언제나 전진하는 중이다. 그 선두에서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팀의 발전을 이끌고 있는 이규삼 분교장과 지난 11월 14일, 경기도 부천의 연습실에서 만났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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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소폰 런앤톡(Learn&Talk)] 프롤로그
- 색소폰을 배우고(Learn), 그 감상을 말(Talk)합니다. 음악이 낯선 기자의 색소폰 도전기. 색소포니스트 임민택씨에게 왕초보를 위한 기본기부터 단계별로 배워가며 아마추어 연주자로의 성장 과정을 기록할 예정입니다. 글·사진 l 박은주 기자 아프다. 정말 아프다. 거울 앞에서 입술을 붙잡고 아프다는 말만 열 번쯤 되뇌었다. 고작 1시간, 그것도 소리만 겨우 냈을 뿐인데 아랫입술 안쪽에 하얗게 치아 자국이 나 있었다. 어떻게든 ‘낮은 솔’을 불어보겠다고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마우스피스와 씨름한 결과였다. 까슬한 자국을 혀로 매만지며 생각했다. 정말 배우는구나, 색소폰을. 기자 경력 6년 차, <월간색소폰>에서는 5개월째. 입사 전까지 음악 관련 커리어는 전무했다. ‘평생 글만 쓰겠다’고 다짐했던 대학 시절에도,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에도, 내가 색소폰 전문 기자가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알아야 글을 쓰는데, ‘파지(把指·손으로 쥠, 악기를 잡는 것을 뜻함)’를 듣고 ‘파지(破紙·찢어진 종이)’를 떠올릴 정도니 사태가 심각했다. 좋은 콘텐츠를 기획하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색소폰을 배우는 수밖에. 섭외를 위한 노력 끝에 색소포니스트 임민택씨가 첫 스승으로, 첫 악기는 영창의 알버트웨버로 정해졌다. 왕초보를 위한 악기 조립법, 앙부슈어(embouchure·마우스피스를 무는 입 모양), 운지, 악보 읽기 등의 기본기부터 꾸밈음이나 애드리브 같은 중·고급 과정까지 단계별로 배워가며 아마추어 연주자로의 성장 과정을 기록할 예정이다. 2024년 1월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이 코너가 색소폰 초심자에게는 독학의 길라잡이가, 중·고급자에게는 옛 추억을 떠올릴 유쾌한 읽을거리가 되기를 바라며 연재를 계획했다. -중략- 임민택씨의 설명에 따라 나름의 모양과 위치를 잡고 첫 호흡을 뱉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뱉어낸 첫 숨인데 웬걸, 바람만 새어 나왔다. 몇 번 더 시도해 보니 소리는 나는데, 임민택씨의 소리처럼 명쾌하지 않고 둔탁한 듯 답답한 음색이었다. 마우스피스를 너무 강하게, 혹은 약하게 조이는 게 문제란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①아랫입술을 적당히 말고, ②피스를 너무 깊거나 얕게 물지 않으면서, ③적당한 강도로 조이되, ④호흡을 일정하게 뱉어내야 한다는 건데…. 여러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오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값을 입력해 오작동 난 기계처럼. 이걸 해야 ‘낮은 솔’을 불 수 있다는데, 피아노 배울 적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그만이었던 ‘솔’을 그제야 불 수 있다는데.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첫 시간부터 이렇게 고비인데. 나, 잘할 수 있을까.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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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거위’들의 첫 비행, 브랜든 색소폰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
- 클래식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국내 최초의 클래식 색소폰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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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상에서 대상으로, 1년 만의 ‘도약’ 더 큰 무대를 꿈꾸는 알레연주단의 하모니
- 제9회 경기도 우수시장 박람회 기념 제2회 색소폰 앙상블 대회가 열렸던 10월의 어느 날. 행사 장소인 경기도 연천의 전곡시장을 아름다운 색소폰의 하모니로 흠뻑 적신 팀이 있었다. 대상 수상팀인 ‘알레연주단’이 그 주인공이다. 불과 1년 전, 1회 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것과 비교하면 눈부신 성장이었다. 이런 결실을 맺고자 혹독한 연습의 시간을 보냈을 알레연주단과 지난 11월 2일, 양평의 음악실에서 만나 대상 수상의 감회와 대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봤다. ▶인터뷰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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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12-01 10:00
장려상에서 대상으로, 1년 만의 ‘도약’ 더 큰 무대를 꿈꾸는 알레연주단의 하모니
제9회 경기도 우수시장 박람회 기념 제2회 색소폰 앙상블 대회가 열렸던 10월의 어느 날. 행사 장소인 경기도 연천의 전곡시장을 아름다운 색소폰의 하모니로 흠뻑 적신 팀이 있었다. 대상 수상팀인 ‘알레연주단’이 그 주인공이다. 불과 1년 전, 1회 대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것과 비교하면 눈부신 성장이었다. 이런 결실을 맺고자 혹독한 연습의 시간을 보냈을 알레연주단과 지난 11월 2일, 양평의 음악실에서 만나 대상 수상의 감회와 대회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봤다. ▶인터뷰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박은주 11-01 10:14
불꽃처럼 타오른 '색소폰 열정'…권영희 한울문화예술인단체 대표
대구에서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이가 있다. 색소폰 부는 ‘쌍둥이 자매’ 중 동생인 권영희 한울문화예술인단체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약 30년 전 색소폰의 매력에 푹 빠져 당시 생업으로 삼고 있던 국악을 단숨에 접고, 전국 각지를 돌며 유명 색소포니스트를 찾아다녔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실에서 보냈고, 잠을 줄여가며 5~6년의 세월동안 색소폰 연습에만 매진했다. 그저 무대에 서는 것이 좋아 각종 행사를 다녔는데 어느덧 ‘행사의 여왕’이라는 별명과 함께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찾아 수강생이 모여들었고, 열평 남짓의 연습실을 확장해야 할 만큼 큰 규모의 한울색소폰아카데미가 만들어졌다. 음악이 좋아 시작한 일이기에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봉사 차원에서 무료 공연을 다녔더니 받게 된 표창장만 수두룩하다. 최근에는 한울문화예술인단체까지 결성해 대표로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를 지난 10월 10일 대구의 동호회 연습실에서 만났다. ▶인터뷰 전문은 월간색소폰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박은주 08-01 08:00
색소포니스트 장인영 "날 이끈 원동력은 즐거움"
사진=정대성 작가 보는 사람마저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와 쾌활한 목소리. 지난 7월 12일 만난 색소포니스트 장인영씨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재밌어서 색소폰을 시작했고, 좀 더 즐겁게 연주하기 위해 지금도 매일 고민한다는 장씨. 색소폰 연주자로, 교육자로, 유튜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가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라는 장씨만의 원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수강생들도, 관객들도 모두 행복한 연주를 하는 게 꿈이라는 장씨를 만나 그의 색소폰 철학을 들어봤다. 11년. 그가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한 시간이다. 교육자로 살아온 지도 벌써 9년이 흘렀다. 고향인 전라남도 순천에서 색소폰 학원을 처음 시작했고, 경기도 평택과 안산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현재는 순천점과 안산점만 운영 중이지만 연주자이자 교육자로서, 또 유튜버로서 여러 역할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모두 ‘색소폰’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색소폰’ 연주자라서, ‘색소폰’ 강사라서, ‘색소폰’ 유튜버라서. 색소폰을 처음 알게 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색소폰이라서 치열하게 살았다. 그때는 치열한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저 재미있어서 했을 뿐인데, 돌이켜보니 온 힘을 다해 색소폰만 쫓고 있었다. 처음 불자마자 결심한 연주자의 꿈 장씨와 색소폰의 인연은 고등학교 관악부에서 시작됐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악기 연주도 좋아했던 터라 입학 후 알게 된 관악부의 존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한다. 그렇게 관악부를 찾아갔는데 “어떤 악기를 불고 싶느냐”는 담당 선생님의 질문에 문득 색소폰이 떠올랐다. 아빠가 수년 전 배우고 집에 놔뒀던 바로 그 색소폰이었다. 그래서 그냥 “색소폰을 불겠다”고 답했고, 점차 색소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색소폰을 처음 불 때부터 마냥 재미있었어요. ‘나 이거 평생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취미로 1년쯤 배우다가 ‘이걸로 대학을 가야겠다, 연주자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어떻게 그런 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스스로의 결심은 확고했지만, 가족을 설득하는 과정이 남아있었다. 당시 여성 색소폰 연주자가 흔치 않았던 때라 부모님의 반대가 거셌다고 한다. 아버지는 “차라리 플루트를 부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장씨를 말렸다. 그때마다 장씨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 이거 하면 평생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행복할 것 같아.” 결국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딸의 고집에 부모님이 백기를 들었다. 자녀가 행복하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딸의 1호 팬이 되었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자로 딸을 응원하고 있다. 부모님의 허락까지 받은 뒤, 장씨는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른 전공생보다 출발이 늦었다는 생각에 누구보다 독하게 연습했다고 한다. 매주 광주까지 레슨을 받으러 갔고, 방학이면 근처에 고시원을 잡아 하루 종일 연습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2년 간 준비한 끝에 지원했던 대학에 모두 합격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잘 몰랐기 때문에 겁 없이 도전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고요. 서울이나 경기권의 입시 시스템을 경험했으면 ‘난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주눅부터 들지 않았을까요.” 10년 만의 첫 여자 전공생, 최연소 졸업생으로 장씨는 그렇게 단국대 실용음악과의 색소폰 전공생이 됐다. 꿈에 그리던 입학이었지만, 막상 학교생활을 시작해보니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우선 10년 만의 첫 여자 색소폰 전공생이라는 타이틀이 무겁게 다가왔다. 장씨는 “남초사회에서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더욱 잘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도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동안 연습해보지 않았던 합주도 장씨의 발목을 잡았다.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 부족한 기본기를 채우기에 급급해 홀로 연습하는 데만 집중한 터였다. 그러니 다른 악기와 합주를 해 본 경험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장씨는 “대학에 와보니 고등학생 때부터 밴드 활동이나 그룹 활동을 경험한 친구들이 많았다”면서 “저는 반주기를 틀고 연습하던 게 전부였는데 갑자기 드럼, 베이스, 피아노 등과 협연을 하려니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그때마다 장씨 특유의 끈기가 발휘됐다. 벽에 부딪히면 더욱 독하게 연습했다. 점차 그런 모습을 좋게 봐주는 선배들이 생겼다. 정말로 포기하고 싶을 땐 선배들의 다독임 속에서 또다시 마음을 잡았다. 동기들이 한 번쯤은 하던 휴학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연주자로 자리 잡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결국 그는 학과의 색소폰 전공생 중 최연소 졸업생으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연주자의 삶을 시작했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내가 이토록 좋아하는 걸 평생 하려면 최대한 빠르게 연주자로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음악을 놓지 않기 위한 제 나름의 노력이었던 거죠.” 물론 대학 시절에는 자신이 연주자로 살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국내 최고의 실력자 정도는 되어야 연주자로 살 수 있는 줄 알았어요.(웃음)” 그런 두려움이 결국에는 좋은 자양분이 됐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보니 무작정 잘하고 열심히 하는 것만이 연주자로 사는데 필요한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물론 그건 기본이고요. 점차 공연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이 찾고 싶은 연주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대학원도 갔고요. 경희대학원에서 문화예술 경영을 공부했어요. 그렇게 공부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아요. 기획자의 시선으로 공연도 제가 먼저 기획하게 됐고요.” 그렇게 만든 게 네 차례 진행했던 ‘오픈콘서트’였다. 콘서트는 1부에서 프로 연주자들이 공연하고, 2부에서 콘서트에 온 관객들이 연주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 구성 때문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저의 연주자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그때가 아닐까요? 잠깐 코로나19 때문에 쉬게 됐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에 대비하며 새로운 걸 기획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유튜버로 새로운 도전 “연주 때문이었죠” 장씨는 색소폰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장인영 색소폰TV’와 라이브 연주로 팬들과 소통하는 ‘장인영 색소폰 연주채널’, 총 2가지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유튜브까지 시작한 것은 연주를 더욱 재밌게, 꾸준히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 그리고 학원 운영 등 다른 역할에 충실하다보니 자꾸 연습시간이 부족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신청곡을 받고, 라이브 연주를 하다보면 책임감 때문에라도 연습을 계속할 테니까요. 말하다 보니 제가 색소폰을 정말 사랑하네요.(웃음)” 이처럼 활발한 활동 덕에 영창의 엔도저로도 선정됐다. 학원 수강생들이 영창의 색소폰을 추천해서 연주해 봤는데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영창과 인연이 닿았고, 지금은 영창만의 트랜디한 사운드에 푹 빠지게 됐다. 교육자로서의 철학도 확고하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배워가는 즐거움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기초 과정은 지루하고, 고급 과정은 지나치게 어려우면 연주에 대한 흥미가 금방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씨는 “색소폰을 배우는 것은 기초부터 고급까지 모든 과정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각 단계마다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늘 고민하면서 가르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씨가 이렇게 수강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은 비교적 늦게 색소폰에 입문한 경험 덕분이었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색소폰을 시작했잖아요. 항상 뒤처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급한 마음도 컸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단기간에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선생님의 조언을 허투루 듣지 않았고, 다른 선배 연주자분들의 공연도 꼼꼼히 보면서 어떻게든 배우려고 노력했죠. 그렇게 쌓아온 노하우들을 잘 다듬어서 수강생분들에게 전해드리고 있는 것 같아요.” 종횡무진이라는 단어가 꼭 어울리는 장씨. 그는 인터뷰 마지막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순천에서 처음 색소폰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여전히 많은 고향 팬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는 것. 무엇보다 순천시민들의 남다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많은 공연이 순천에서 열리길 바란다는 소망을 전했다. “순천이 정말 아름답잖아요.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민들이 여유가 넘치고, 향유하는 것을 좋아해요. 문화예술을 정말 사랑하고요. 그래서 제가 순천 출신 연주자로서 한 가지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서울 경기권에서 열리는 좋은 공연들이 순천에도 자주 찾아와줬으면 한다는 거예요. 순천에 더욱 많은 문화의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Saxophone Setting 알토 색소폰 알버트웨버 슈페리어2 리드 java 2 1/2 리가처 실버스틴 헥사 소프라노 색소폰 알버트웨버 S76GP 리드 java 2 1/2 리가처 실버스틴 헥사 GP 테너 색소폰 알버트웨버 T76RG 리드 AW 2 1/2 리가처 실버스틴 실버 -
안지인 06-01 08:00
“감동을 주는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감동을 주는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색소포니스트 김지석 색소포니스트 김지석 씨와의 인터뷰는 이번이 두 번째로, 구면이었다. (그의 음악 세계 또는 재즈 뮤지션이 되기 위한 여정이 궁금한 사람들이 있다면 〈월간색소폰〉 2020년 9월호를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약 3년 만에 만난 그는 일면식이 있었던 탓인지 전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3년간의 시간 동안 뮤지션으로서 가지는 변화와 성장의 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간 겪었던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글 안지인 기자 색소포니스트 김지석(이하 김지석 연주자)는 2021년에 두 번째 정규 앨범 〈Anderson's Secret Life〉를 내고 같은 해에 떠난 363일의 긴 여행에서 얻은 영감으로 현재 3집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한양대학교에서 학과장, 대학원 주임을 맡아 후배 뮤지션 양성에 힘 쏟으며 자신 또한 그에 못지않게 배워나가는 중이라는 김지석 연주자는 여행을 통한 새로운 각도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견고히 만들고 있다. 안녕하세요. 김지석 연주자님. 오랜만에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학교에서 안식년이라는 시기가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1년 동안 학교를 쉬면서 개인적인 공연 활동을 하거나 외국 교환 교수 또는 단순히 재충전의 기회로 사용할 수 있는 있는 시간이 주어져요. 당시 코로나가 극심했던 시기라 연주는 못할 것 같고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새로운 경험들을 하자는 취지에서 여행을 하기로 했죠.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각국의 다채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또 새로운 음악들도 많이 만났어요. 굉장히 과감한 결정을 하셨네요. 1년 동안의 여행이라면 다양한 경험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보통 일주일 정도 놀러 가면 좋은 기억으로 돌아오잖아요. 그런데 1년을 여행하니까 정말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되고 희로애락이 다 생기더라고요. 즐겁고 행복한 경험도 있지만 좌절하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적도 많았어요. 처음에는 뉴욕에서 한 달 있으면서 지인들과 공연도 하고 예전에 제가 살았던 경험들 기억들을 추억하고 싶어서 이곳저곳 다니며 친구들과 이야기도 하고 사는 것도 보고 그랬죠. 제가 떠난 지가 벌써 15, 6년이 지났으니까요. 그다음에는 멕시코로 쭉 내려와서 코스타리카, 에콰도르,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한 군데에 한 달 정도씩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집트로 와서 터키로 가고 터키에서 그리스로 유럽에서 3, 4개월 정도 있다가 한국으로 왔거든요. 여행을 통해 느꼈던 점들 혹은 인상 깊었던 일들이 있었나요? 뉴욕에서 한 달을 보낸 후 남미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살아야겠다는 생존 문제가 더 급박해지기 시작했어요(웃음). 문명국도 있지만 개발도상국이 많아서 여러 가지로 힘든 점이 있었고, 그렇다 보니 음악을 제가 직접 하는 경우는 없었죠. 정말 살면서 악기를 가장 오래 놓았던 시기였어요. 그런 와중에 악기를 계속 들고 다녔어야 했고 정말 몇 번이고 집으로 보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악기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죠. 그럼에도 악기를 계속 등에 짊어지고 다니다 보니 결국은 나의 업보(?)라는 느낌이 제 모습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것 같았어요(웃음). 그럼에도 인상 깊었던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자연의 경이로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과 통하며 느꼈던 감동, 문화적인 경이로움, 깊고 훌륭한 문화들을 갖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를 느낀 적도 있었죠. 남미도 나라마다 고유한 특성들이 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음악들, 문화를 접하고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더 풍족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시기였어요.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느꼈을 감정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거의 10개월 동안 악기 연주를 못 했다 보니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가 많이 생겼어요. 예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다고 해야 되나? 매일 공연 가고 연습하고 싶을 때 하는 느낌으로 평생을 살아오다가 거의 처음으로 이런 일을 겪으니 한국에 돌아와 연주를 하면서 진심으로 기뻤어요. 타성에 젖은 기쁨이 아니라 소중하고 재미있고 너무나도 좋았죠. 여행 전에 앨범을 내고 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 앨범으로 클럽이나 소극장에서 연주를 많이 했고 재즈보컬리스트 마리아 킴 씨와 페스티벌 공연을 다니기도 했고요. 그리고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재즈 뮤지션들이 있는데, 프로젝트가 항상 있어요. 외국에서 그들의 뮤지션 친구들이 한국으로 와 같이 투어를 하게 되면 저와 함께 기획 공연 연주도 했었고, 12월에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서 ‘클래식과 재즈의 만남’이라는 테마로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를 했어요. 〈Charlie Parker With Strings〉라는 앨범이 있거든요. 찰리 파커가 알토 색소폰으로 솔로 연주를 하고 뒤에서 스트링이 같이 어우러져서 클래식과 재즈가 만나는 시도의 초창기라고 해야 되나. 그런 시도의 클래식적인 버전으로 제안이 들어와서 솔로이스트로 협연했고, 이후에도 계속 제 공연을 잡아서 하고 있어요. 여행 이전과 음악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있었나요?. 접근 방식, 콘셉트, 바라보는 각도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긴 시간 동안 연주를 안 하다가 했을 때 테크닉적인 손실이 크잖아요. 손가락이 돌아가던 게 안 돌아간다든지, 음정이 잘 나던 게 안 난다든지. 그걸 감안하기 위해서는 아껴 써야 되는 느낌 혹은 군더더기나 불필요한 거를 줄이고 조금 더 짜임새 있고 요약적인 느낌으로 음악을 표현해야 되는 그런 환경으로 본의 아니게 몰려간 거니까요. 더 간결하면서도 의미 있는 솔로를 하려는 각도가 예전에 비해서 더 생긴 것 같아요. 현재 3집 앨범과 즉흥연주 기법 내용이 담긴 책을 쓰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3집 앨범을 구상 중에 있고 곡을 써나가고 있어요. 첫 번째 앨범의 콘셉트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나의 정체성,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에 대한 고뇌를 주제로 잡았었고, 두 번째 앨범에서는 나의 일상 속 생각과 느낌을 담았다면 이번에는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어요. 꼭 그게 장르적으로 음악적 장치가 새롭다기보다는 조금 더 추상적인 개념으로 예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것, 사운드를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고 조금 더 프리하게 생각하면서 시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면 1년간의 여행을 테마로 해서 그때 보고 느꼈던 것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잡고 작업을 하는 것도 제 스스로에게는 그때의 기억들이나 경험들이 음악적으로 어느 정도 반영돼 훗날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또 제가 학교에서 즉흥 연주를 오랫동안 가르치며 들었던 생각이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즉흥연주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였어요. 저도 처음 악기를 잡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일 때 즉흥연주에 대해서 조금 더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있을까 해서 찾아봐도 대부분의 수준이 너무 그 단계를 뛰어넘는 경우가 많았어요. 책에 적힌 스케일 연습을 해도 즉흥연주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방법론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서 재즈 전문 연주자들이 하는 정도 수준의 비밥 즉흥연주까지 아우를 수 있는 즉흥연주 기법에 대한 책을 계속 쓰고 있어요. 현재 거의 완성 단계이고 올해 여름 즈음에 나올 것 같아요 . 나는 현재 어떤 연주를 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어떤 연주를 하고 싶은 사람인가요? 제가 어떤 연주를 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어떤 연주를 하고 싶은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아요.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특히 음악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 감탄이나 감동 둘 중에 하나인 것 같거든요. 화려한 기교와 재능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감탄과, 그런 기교가 아닌데 전달되는 게너무 강렬해서 뭉클해지는 그런 감동 그 두 가지의 경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감탄보다는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는 음악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항상 “감탄을 주긴 줘야 되는데”하고 생각하죠(웃음). 감동이라고 하면 뭔가 호소력 있는 연주 이렇게 동의어처럼 생각할 수 있잖아요. 얼핏 생각하면 호소력이라는 게 큰 다이내믹을 연주로 표현하거나 혹은 간절하고 음악적인소리로 인간의 감정을 비유하는 느낌만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생각엔 꼭 그것도 아닌 것 같거든요. 결국에는 음악은 언어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언어는 아니잖아요. 그렇기때문에 쳇 베이커가 연주할 때 보면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느껴질정도로 모노토닉하게 연주를 하거든요. 큰 다이내믹으로 연주하지 않아요. 마일즈 데이비스도 그렇고요. 그래서 쿨재즈라는 표현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걸 들을 때도 감동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감동을 주는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다”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 말의 의미에 대해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감동을 주는 연주’라는 개념을 조금 더 깊이있게 연구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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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11-01 10:50
[Classique] "작곡가의 영혼이 살아 숨 쉬도록" 색소포니스트 우에노 코헤이
일본의 유명 클래식 색소포니스트이자 야마하 아티스트인 우에노 코헤이가 최근 첫 내한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마스터 클래스부터 국내 연주자들과의 협연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한 그. 지난 9월에는 새 앨범을 공개하는 등 활발히 활동 중인 그와 서면 인터뷰로 만나 한국 방문의 소회와 신보 소개, 그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중략 - Q. 우에노 코헤이씨가 추구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색소폰 연주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듣고 싶어요. A. 작곡가의 작품을 지금 이 순간 현재의 공간에서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게 음악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조건들이 맞아떨어져서 만족스러운 음악이 나올 때 최고의 행복을 느껴요. 현시대에 존재할 수 없는 작곡가가 현장에 나타난 느낌이랄까요. 색소폰의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그래서 제가 지금 그 역사의 일부분을 장식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재미를 크게 느끼는 것 같아요. ▶인터뷰 전문은 월간색소폰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07-01 08:00
색소포니스트 김원태
Q. 안녕하세요. 김원태 연주자님.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동대문구에서 서앤김 색소폰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색소포니스트 김원태라고 합니다. 현재 교육 활동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온·오프라인에서 솔로, 듀엣, 4중주 등 클래식과 대중음악 연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교육을 위주로 활동을 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하고 계시나요? A. 아무래도 제가 연주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색소폰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아야하고 그런 분들이 많아지려면 관심을 가지고 연주하는 분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걸 느꼈던 계기가 클래식 색소폰을 전공하며 공연을 준비하고 무대에 섰을 때 관객들의 거의 대부분은 색소폰 연주를 하는 분들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Q. 유튜브 활동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콘텐츠를 다루시나요? A. 지금 현재로서는 연주 영상을 위주로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젊은 세대 분들도 색소폰에 관심을 많이 가지셔서 특정 세대에 치우치지 않는 선곡을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차후에는 악기에 관련된 리뷰라든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는 소통 콘텐츠 같은 것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Q. 온라인에서 대중음악 장르를 연주하기로 한 계기가 있을까 요? A. 제가 처음 색소폰을 취미로 연주했을 때는 클래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가요나 팝 같은 대중음악 장르를 위주 로 연주를 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중음악에 대한 로망을 품고 언젠가 대중음악 장르도 프로의 수준으로 연주하는 연 주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현재는 그 목표를 이루어 나가고 있어요. 취미로 색소폰을 했을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음대를 나왔다는 것 혹은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것에 대한 괜한 부담감이 느껴지긴 하더라고 요. 그래서 대중음악 연주에 진지하게 임하게 되고 음악적인욕심도 큰 것 같습니다. Q. 음악적으로 알아가는 부분이 많다고 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점들을 느끼셨나요? A. 클래식 음악은 라이브 연주 위주로 연구하게 되거든요. 무대에서 관객들한테 어떻게 연주가 들리게 될까를 고민하는 데, 대중음악을 연주하고 유튜브 촬영을 하면서 녹음이 어떻게 되는가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덕분에 녹 음하는 기술을 어깨너머로나마 배우게 되는 부분도 있었고또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작 곡가의 의도를 얼마나 잘 반영을 해서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부분인데, 대중음악에서는 이 곡을 통해서 나의 개성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을 때는 사실 지우고 싶은 영상도 몇 개 있었죠. 나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악보대로 연주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 부족한 점을 느꼈거든요. 그래도 시 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부분들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고 현재도 그 부분을 가장 깊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연주적인 측면에서 클래식과 대중음악 장르를 어떻게 접목시 키는 편인가요? A. 처음 대중가요 연주를 시작할 때 두 장르의 색깔이 명확하게 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 확실하게 다르게 구분 지어서 연주하다 나중에 두 개를 접목하면 좀 더 확실한 나의 색깔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에요. 두 가지 장르를 다 연주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클래식 연주를 할 때는 대중음악 연주자의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고 대중음악을 연주할 때는 이 사람이 클래식을 전공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칭찬처럼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농담 삼아서 이중인격자 같다는 얘기도 들었죠(웃음). 다 연주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클래식 연주를 할 때는 대중음악 연주자의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고 대중음악을 연주할 때는 이 사람이 클래식을 전공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칭찬처럼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농담 삼아서 이중인격자 같다는 얘기도 들었죠(웃음). 연주를 하는 게 중요하죠. 또한, 음악은 듣는 사람이 기분이 좋고 감동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음악을 통해 대중들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그런 음악이요.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로가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Q.김원태 색소포니스트는 어떤 스타일로 연주하는 연주자인가요? A. 클래식 연주에 있어서는 저는 주변 동료 연주자들에 비해서 약간 화려하게 연주하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비브라토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조금 더 빠르거나 폭이 깊거나 하는 움직임이 많은 연주를 선호하는 편이었고요. 선곡에 있어서도 아주 잔잔하거나 서정적인 곡들을 위주로 하기보다는 조금 볼륨감을 나타낼 수 있는 음악이나 움직임이 화려한 음악들을 주로 연주하길 좋아했습니다. 아티큘레이션도 조금 명확하게 하는 편이었어요. 아주 난해한 현대 음악 같은 학문적 가치가 높은 연주 스타일보다는 관객이 듣기 좋은 그런 음악들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Q. 연주를 할 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완성도를 높이는 편인가요? A. 일정 기간 정도 색소폰에 미쳐서 살았던 시간이 있었어요. 음악성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기술적인 면을 많이 연습하고 그걸 기반으로 음악적인 면을 개발하는 편이에요. 기본이 탄탄한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나하는 생각입니다. 연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테크닉과 음악 공통적인 부분에서 스스로 녹음을 해보고 자신의 연주를 많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아요. 제가 색소폰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이 정도면 들어줄 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으로 녹음을 해서 들어보았는데, 그 충격은 잊을 수가 없어요(웃음). 녹음을 하다 보면 연주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들리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연주를 하고 있구나 하는 부분이 처음에는 굉장히 괴롭습니다. 연주를 하면서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 어떤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도 모니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Q.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 말해주세요. A. 제가 하는 활동들이 대부분 연주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걸로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연주 활동을 지속하고 싶다는 이것 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피드백이 오는 것을 제가 즐거워 하는 것 같아요. 연주가 너무 좋았다거나 연주를 통해서 힐링 을 받았다거나 이런 피드백을 받았을 때 굉장히 즐거움을 느끼고 직업적인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제가 혹시나 다른 일 로 바빠서 연주력이 떨어지거나 하더라도 관객 중 누구라도감동을 느끼게 할 수만 있다면 진심을 다해서 연습하고 준비 한 부분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나가고 싶어요. 또, 젊은 세대에게서 색소폰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을 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어요. 젊은 분들이 찾아주실 만한 연주곡들을 선곡해 유튜브 연주 영상으로 업로드할 예정이고 교육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수업을 진행 과정들을 정리를 해서 교재를 제작해볼 생각입니다. 교육하는 스타일이 선생님마다 다르다 보니 제가 수업하는 스타일 혹은 제가 만든 커리큘럼이 잘 맞는 분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잘 만들어보려고 노력을 할 것 같고요. 현재 연주 활동은 오프라인에서는 클래식, 온라인에서는 대중음악 위주로 활동을 하고있는데, 추후에는 둘을 섞어볼 생각이에요. 유튜브에서는 클래식 음악도 더 많이 업로드 해볼 생각이고 오프라인에서는 대중음악 연주 비중을 더 늘려갈 생각이입니다. 둘 다 챙긴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욕심을 내볼 생각입니다. -
안지인 07-01 08:00
색소포니스트 최희훈
전국 각지의 행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최희훈 연주자는 야마하색소폰 글로벌 사이트에 등록된 아티스트이며, ㈜엘프프로페셔널반주기 전속 모델, 다다리오 우드윈드 아티스트 등의 업체에서 색소폰계의 아이돌로 불리며 사랑받는 연주자로 정평이 나있다. 그밖에 〈최희훈색소폰CCM〉 1집 발매로 갓피플 차트 1위, 각종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협연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 행사로 입지를 다지고 있으며, 근래에는 강남대학교 색소폰 아카데미 최연소 교수로 지난 3월에 첫 개강을 가졌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연주를 통해 크로스오버가 아닌 ‘크로스오버형’ 연주자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그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글 안지인 기자 최희훈 연주자는 일전에 본지 3주년 기념 인터뷰로 출연한 적이있다. (2019년 7월호 참조) 그때의 출연이 4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업체의 러브콜과 동시에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바쁘게 살 수 있었던 기점이 됐다고 말하는 그는 창간 7주년을 맞이한 〈월간색소폰〉과 다시 한번 만나 인터뷰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Q. 안녕하세요. 최희훈 연주자님.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야마하색소폰 글로벌 사이트에 등록된 아티스트이며, 엘프 반주기 전속 모델, 다다리오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최희훈 색소폰 스튜디오 1·2호점을 운영하며 강남대학교 색소폰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요즘 바쁘게 활동하시는 걸로 압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A. 클래식, 팝, 대중가요 세 가지 장르를 다 연주하는 크로스오버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세 가지 장르를 다 잘하려고 하다 보니 바빠지더라고요. 색소폰이라는 악기도 알리고, 색소폰의 매력 또는 색소폰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음악이 있다는 걸을 알리려고 하다 보니 전국 각지를 오가며 바쁘게 활동하게 되는 것같습니다. Q. 2019년도 3주년 인터뷰 이후로 꼭 4년 만에 다시 나오셨네요. A. 사실 그때는 제가 월간색소폰을 잘 몰랐어요. 저한테 수업을 받으러 오시는 분이 월간색소폰이라는 잡지가 있다고 소개해주셔서 당시 요즘 뜨고 있는 차세대 젊은 연주자로 소개가 됐었거든요. 그때 제가 우러러보던 분들과 같이 나와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걸로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던 하나의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색소폰 반주기 회사 ㈜엘프에서 관심을 주셨고 그게 잘 돼서 녹음도 하고 전속 모델이 됐죠. 이후에 엘프 송년의 밤 행사 때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통해 야마하와도 인연이 생기게 되었고, 다다리오와도 콘택트가 되어서 아티스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월간색소폰〉이 제게는 불이 붙을 수 있었던 시발점이라고 생각해서 굉장히 뜻깊죠. 그래서 이렇게 7주년 인터뷰도 하고 싶었고, 구독자분들과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Q.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간 어떤 점들이 많이 변한 것 같나요? A. 일단은 연주가 많이 바뀌었어요. 아무래도 기업들과의 계약으로 인해서 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 연주가 누군가에게 표본이 될 수 있게 퀄리티 있는 연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전에 비해서 조금 더 고급스럽고 전문적인 연주로 변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연주 콘셉트도 무대에 올라서 보이는 행동이나 퍼포먼스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등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어요. 내가 열심히만 하면 좋은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느껴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시기가 만들어졌죠. Q. 클래식 연주자에서 크로스오버 연주자가 되기까지 난관이 많았을 것 같아요. A. 모든 사람이 저를 실용음악 전공을 한 연주자로 보거든요. 그런데 저는 클래식 색소폰을 전공했어요(웃음). 사실 클래식 색소폰을 하면서 대중음악을 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얘기거든요. 그럼에도 저는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크로스오버형 연주자가 되고 싶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대중음악의 느낌을 내는 뉘앙스가 안 나와정말 힘들었는데, 제가 바뀌기 위해서 정말 여러 연주자들의 연주를 많이 듣고 카피하며 독학으로 공부를 많이 했거든요. 재즈 용어부터 시작해서 유튜브 강의를 참고해 어떻게 연습해야하는지 모든 것을 스스로 찾으며 열심히 했는데, 그 시간이 한 4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Q. 클래식 연주자 출신이다 보니, 그에 대한 질타 섞인 시선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A. 근래에는 다들 절 좋아해주시지만 전에는 클래식 연주자면 본인 영역에서 활동해야지라는 인식도 있었어요. 하지만 색소폰이라는 어떤 하나의 악기가 여러 가지의 장르로 구사되는 건 당연하고 음악을 하는 사람이 다양한 장르를 섭렵할 수 있다는 건 연주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처음에 클래식처럼 대중음악에 다가가지만 않으면 저한테 질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질타를 받았던 건 제가 가요나 팝이라는 장르를 클래식화 시켰기 때문이었던 거죠. 처음에는 솔직히 그런 질타가 약이 됐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었죠. Q. 자신은 어떤 매력을 가진 연주자라고 생각하나요? A. 저는 색소폰이라는 악기로 다양한 장르를 도전하는 연주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크로스오버형 연주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게 제가 하고 있는 음악이고 제가 앞으로도 노력을 해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또 저의 음악에서는 팝스러우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이 묻어나기 때문에 기존에 듣던 소리가아니라 독보적이라는 평도 받았어요. 세미클래식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믹스가 잘 된 편인 것 같습니다(웃음). Q. 앞으로의 목표, 계획, 이루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얘기해주세요. A. 당장은 진주에 있는 행사부터 해서 10월에는 제주 국제 관악제에 방문해서 연주가 있고요. 청소년 관악제 콩쿠르 심사도 가고 현재 제가 교수로 있는 강남대학교에서도 콘서트가 잡혀있습니다.야마하 뮤직 코리아에서 야마하 클리닉이라는 행사를 하거든요. 전국 각지의 동호회를 돌아다니면서 무료로 원 포인트 레슨을 해주고 쉽게 레슨을 받지 못하는 먼 지방을 다니면서 악기 시연회와 연주와 악기를 무상점검해주는 야마하뮤직코리아만의 행사에요.이 행사를 통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색소폰의 매력이 무궁무진하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훗날 제가 바라는 게 있다면 색소폰을 장르로 구분 짓지 않는 시장이 도래하면 좋겠어요. 클래식 재즈 따질 거 없이 그냥 색소폰이라는 악기 자체로 여러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그런 거를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올해 10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최희훈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으로 색소폰 독주회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1부는 클래식 연주, 2부는 재즈 또는 팝, 3부는 대중가요 이렇게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스타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연주를 모든 분들께보여드리고 싶어요. Saxophone Setting 테너 색소폰야마하 82Z ASP 마우스피스과데라 MB2 리드다다리오 재즈 셀렉터 2호 H Saxophone Setting 알토 색소폰야마하 875EXGP 마우스피스비츨러 ARB 6호 리드다다리오 재즈 셀렉터 3S -
06-01 08:00
[Classicque] 색소포니스트 빈재현
Q.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색소포니스트 빈재현 입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색소폰콰르텟 ‘앤’의 리더와 ‘일방통행 색소폰앙상블’에서 테너 색소폰을 맡고 있습니다. 대중과 더가까워질 수 있는 연주를 하기 위해서 팀 연주를 많이 하고 있고 제자들 양성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음악적 확립을 위해 현재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Q. 프랑스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제 스스로가 이곡을 안 해봤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을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설 때가 있어요. 다 른 새로운 곡을 접했을 때, 혹은 남한테 알려줄 때 어떠한 근거로 알려줘야 할 지 판단을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의 음악적 스타일을 확립하고자 프랑스 유학을 가려고 마음먹게되었습니다. Q. 현재 유학 준비 중이신데 어떤 과정이 필요한 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입학 설명에 관련해 학교 측에 입학시험 의뢰 메일을 보냈더니 학교 사이트를 참고하라고 하더라고요. 사이트가 친절하지 않아서 애를 먹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베르사유음악원 시험을 영상으로 볼 수 있었어요. 영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촬영을 해야 하고 총 30분에 달하는 곡을 세 개 연주했습니다. 영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촬영을 해야 하고, 특별한 지정곡은 없지만 난이도가 좀 떨어지는 곡을 하면 메리트가 없을 것 같아 그에 맞게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Q. 음악교육신문사 콩쿠르 색소폰 부문 1등. 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콩쿠르 최우수 1등, 국제 학생 콩쿠르 색소폰 부문 2등,대한민국 관악콩쿠르 색소폰 최우수, 서울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 콩쿠르 1등, 음악교육신문사 콩쿠르 관악 전체 대상 등 다양한 콩쿠르에서 수상 이력이 있는데. 콩쿠르에 많이 나가려고 한 이유가 있나요? 또한 콩쿠르 출전 통해서 들었던 생각은 무엇이며, 그런 과정에서 어떤 성장을 이루었는지 궁금합니다. A. 모든 콩쿠르의 경험이 너무나도 신중하고 소중한 시간들이었어요. 제가 상을 타려고 콩쿠르를 나가는 것은 아니었고 요. 콩쿠르를 하나씩 경험할 때마다 한 곡씩 완성된 곡을 얻을 수 있었죠. 실수를 할 때는 좌절을 하면서 마인드 컨트롤을 배 웠고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무대에서의 제 자신을 바라보고 곡 해석을 하나씩 해나가면 서 어느덧 성숙한 연주자로 거듭나 있었어요. 그렇게 곡에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연주하다 보니 저절로 상도 타게 되었고요. 진심을 다하면 그 진심이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Q. 나를 대변할 수 있는 곡이 있다면 어떤 곡을 꼽을 수 있을까요? A. 프랑스 작곡가 자크 이베르(Jacques Ibert)의 〈ConcertinoDa Camera〉라는 작품입니다. 작곡가 이베르의 곡은 굉장히 리드미컬하면서 음표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부분에서 이곡을 좋아하고 저를 표현할 수있는 곡이 아닐까 생각해요. Q. 빈재현 연주자는 어떤 스타일의 연주를 하는 사람인가요? A. 연주자는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확고해야 해요. 확립이 안 된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가면 객석에서는 저 연주자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거든요. 설득력 있는연주를 하는 게 중요하죠. 또한, 음악은 듣는 사람이 기분이 좋고 감동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음악을 통해 대중들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그런 음악이요.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로가 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Q. 좋아하는 작곡가 또는 음악가가 있나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A. 현재까지 너무나 무수한 작곡가와 음악가들이 많은데요. 그중 가장 궁금한 음악가는 울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제가 조카를 두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제가 이 위대한 분을 만났다면, 혹은 그분이 색소폰 을 알았다면 무슨 곡을 썼을지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제가 모차르트의 곡을 제대로 해석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모차르트의 곡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스러운 음악 같기도 해서 그런지 장난감 노래나 심지어 세탁기의 끝 나는 음악 등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편안하고 즐거움이 가득한 노래들인데 색소폰 곡이 나오면 과 연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색소폰으로 모차르트의 곡을 부드럽고 감성적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너무 궁금해요. Q. 고마웠던 사람들이 있나요? A. 제 모교인 군포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관악부 생활을 했어요. 덕분에 인문계 고등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습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죠. 그런 부분에서 감사하게 생각하고,제 바로 한 학년 위 선배였던 황도현 색소포니스트라고 그분 께도 도움을 많이 받았고 제가 졸업한 한예종 선배님이기도 했던 안왕식 선생님께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Q. 월간색소폰 구독자에게 마지막 인사 부탁드립니다. A.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힘드신 분이 있다면 제 색소폰 연주가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에 보답해 좋은 연주로 만나 뵙겠습니다. 하루는 라디오에서 하루는 텔레비전에서 하루는 매거진에서 한국의 빛나는 빈재현 연주자로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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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12-01 10:00
꿈꾸는 ‘거위’들의 첫 비행, 브랜든 색소폰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
클래식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국내 최초의 클래식 색소폰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
글·사진 박은주 11-01 10:39
푸른빛으로 타오르는 재즈…18세 청춘들의 '블루 자이언트(Blus Giant)'
블루 자이언트 특별 시사회에서 공연 중인 색소포니스트 김성주씨 일본에 이어 미국 관객까지 사로잡은 재즈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Blue Giant)’가 10월 18일 국내 개봉했다. 동명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만큼 국내 재즈 마니아들의 뜨거운 관심이 계속되고 있다. 개봉 전부터 주요 재즈 클럽을 중심으로 각종 이벤트가 열렸고, SNS에서도 관련 게시물이 쏟아지는 중이다. <월간색소폰>은 그중에서도 지난 10월 9일 ‘천년동안도 강남’에서 열린 특별 시사회에 참석해 ‘블루 자이언트의 재즈’를 미리 만나봤다. 사방으로 푸른 빛이 튄다. 한계를 넘어 뜨겁게 달아오른 온도는 붉은빛을 내뿜다 못해 서슬 퍼런빛으로 밤하늘을 수놓는다. 그렇게 반짝이는 별을 가리키는 말인 ‘블루 자이언트’. 엄청난 무대를 펼친 재즈 플레이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연주는 관객을 매료시키고, 공연장을 달군 열기는 강렬한 스파크처럼 번쩍인다. 그 압도적인 기세가 영화 블루 자이언트의 매순간에 깃들어있다. 블루 자이언트 그 자체인 주인공 ‘다이’도, 열정만큼은 다이 못지않은 동료들도, 거장의 손길이 담긴 음악도, 성장 만화의 정석인 스토리도, 모두 숨이 막힐 듯한 맹렬함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중략- 물론 목표가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언제나 찬사만 받던 유키노리가 한 사건을 계기로 슬럼프에 빠졌다가 이를 극복하거나, 쏘 블루의 무대를 앞두고 큰 위기가 닥치는 등 여러 고비가 등장한다. 여느 성장 드라마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클리셰다. 그러나 그 클리셰가 진부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주인공들의 진심 어린 열정 때문이 아닐까. 때로는 세련된 말보다 촌스럽고 투박한 고백이 마음을 울리 듯,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세 사람의 의지는 뭉근한 감동을 준다. 아무리 진부해도, 결말이 예상돼도, 가난한 청년의 자수성가 스토리를 응원하게 되는 것처럼, 어느샌가 이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장까지 까보이는 연주”로 온 마음을 다해 열정을 토해내는데, 그 진심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글·사진 박은주 10-04 14:08
음악대학에서 꽃피우는 ‘만학의 기쁨’…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 색소폰 전공 학생들이 합주 연습을 하고 있다.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를 방문한 9월 13일. 강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전 10시가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인데도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던 이들은 실용음악예술과의 색소폰 전공생들. 그중에서도 인생의 중반기, 혹은 황혼기에 접어들어 음악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만학도들이다. 이들의 지도 교수는 강릉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색소포니스트 장용국씨. 이날 장씨의 안내에 따라 색소폰 전공 수업과 합주 연습을 차례로 참관했다. 이날 처음으로 만나 본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색소폰 전공생 ▲이정연 ▲황미자 ▲장종석씨였다. 예비 졸업생의 연주를 듣고 한 명 한 명 세심하게 피드백을 주는 실습수업이기 때문에 대게 소규모의 정원으로 진행된다. 한명씩 무대에 올라 연주를 선보이면, 장씨가 보완할 점을 가르쳐주는 식이다. 장씨는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날카로운 시선으로 학생들의 연주를 분석했다. 구체적인 연습 방법부터 선곡에 대한 조언, 마이크의 위치를 제대로 선정하는 방법까지. 학생들의 연주를 듣는 동안 피드백 내용을 적는 장씨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 반대로 잘한 부분은 적극적으로 칭찬했다. 지난 수업 때에 비브라토가 좋아진 학생에게 연습량을 칭찬하는 등 세심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진행된 합주 수업. 기타, 피아노, 드럼, 보컬, 색소폰 등 각 파트의 학생들이 전부 무대로 나와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작은 실수가 나올 때도 있었지만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다시 호흡을 맞춰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피아노 전공생들과 기타 전공생들의 수준급 연주 덕분에 무사히 합주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현재 강릉영동대학교는 실용음악예술과 외에도 다른 학과에서 만학도 입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학도로 학교생활을 시작하더라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커리큘럼을 밟는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 만학도의 특성상 학교생활에 무리는 없을까. 수업 참관이 마무리된 뒤 실용음악예술과 학과장인 이상규 교수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Mini Interview 실용음악예술과 학과장 이상규 교수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저 교수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 학과장 이상규입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한 뒤, 이탈리아의 밀라노 국립음악원에서 성악과와 오페라과를 전공했습니다. 국립음악원이 이탈리아 전역에 있는데, 밀라노에서는 최초로 5년 과정을 1년 8개월 만에 조기졸업한 뒤 최고 연주자 과정까지 밟았습니다. 이후 유럽에서 활동하며 10편 이상의 오페라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는데요. 귀국 후 서울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성악을, 백석예술대학교에서 뮤지컬을 가르쳤습니다. 현재 강릉영동대학교에서 오페라, 성악,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학과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을까요? 만학도 분들이 많이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젊은 시절 음악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시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꿈을 접게 된 많은 분들이 강릉영동대 실용음악예술과를 찾아주고 계세요. 비수도권 지역이라서 인구가 많지 않은 편인데,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정말 많더라고요. 지역 자치센터나 학원, 동호회 등을 통해서 음악 활동을 하실 수도 있지만 좀 더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과 만나 뵙고 있죠. 만학의 열정과 기쁨은 남다를 것 같아요. 그분들을 지도하시는 건 어떠세요? 생업을 유지하면서 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거겠죠. 저는 그동안 20대 전공생들을 주로 가르쳐왔는데, 이렇게 음악을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분들과 만나고,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현역 학생들뿐만 아니라 만학도 분들의 열정까지 계속 북돋아주기 위해 힘쓰고 있는 중입니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도 있나요? 아무래도 늦은 나이에 시작하신 전공 공부이기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 많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도 교수님들에게 항상 ‘맞춤형 수업’을 강조하거든요. 물론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학생 분들이 더욱 즐겁게 학업에 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고, 또 기본기가 부족할 수 있어서 기초 수업에도 더욱 많이 시간을 할애하는 편입니다. 만학도 분들과 현역 학생들이 서로 북돋아주면서 좋은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참 감사한 것 같아요. 실용예술음악과가 생긴지 3년이 채 되지 않았죠? 홍보에 대한 고민도 있으시겠어요. 아무래도 그게 아쉬운 부분이에요. 아직 많은 분들이 모르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더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죠. 그래서 저희만의 공연 브랜드를 만들었는데요. 이름이 ‘빠따떼’예요. 어감이 좀 센 편이죠?(웃음) 이탈리아어로 감자라는 뜻인데요. 강원 영동 지역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데, 이 지역에 감자나 옥수수가 많이 난다는 얘기를 듣고 착안해냈죠. 이름이 너무 귀여운데요? 입에 착 붙는 것 같아요.(웃음)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고 있는 건가요? 맞아요. ‘빠따떼 더 리허설’과 정식 공연인 ‘빠따떼’로 나누어 진행하고 있는데요. 일단 저희만의 공연 브랜드를 만들었던 가장 큰 취지가 학생들이 무대를 더욱 즐길 수 있도록 무대 경험을 많이 쌓아주자는 거였어요. 그래서 ‘빠따떼 더 리허설’ 때는 관객 분들을 초대하지 않아요. 갑자기 무대에 서면 학생들이 압도될 수 있어서요. 그보다 여태까지 열심히 연습한 것을 마음껏 뽐내면서 ‘무대는 놀이터’라는 생각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죠. 이후 학기 말에 ‘빠따떼’, 그러니까 정기 공연을 열어요. 지난 학기에 첫 연주회를 열었는데요. 학생들이 긴장감 있게 공연을 준비하더라고요. 열심히 하다 보니 실력도 향상되고, 기억에 남는다는 좋은 피드백도 많았고요. 그래서 졸업 시즌에는 ‘빠따떼 더 졸업’이라는 타이틀로 졸업 연주회를 열어보려 기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학과장으로 계시면서 가장 집중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각자 다양한 색깔을 가진 학생들이 한곳에 모여 학교생활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강릉영동대학교 실업음악예술과라는 하나의 타이틀 아래 마음이 모여질 수 있도록 가장 신경 쓰는 것 같아요. 그래야 합주 같은 걸 할 때도 더 좋은 호흡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학생 상담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어요.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더 즐거움을 느꼈으면 하거든요. 학과장으로 계시는 동안 꼭 이루고 싶은 목표 같은 것도 있을까요? 아무래도 학과가 생긴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널리 알리는 게 가장 큰 목표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는데, 음악 전공이다 보니 공연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그런 취지로 빠따떼도 만든 건데요. GNL이라는 저희 교수진 밴드도 만들었어요. 강릉의 약자인 GN에 라이프(Life)의 L을 따온 거예요.(웃음) 저희가 빠따떼 연주회 때 공연을 하기도 하지만, 강릉 시내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공연도 하고, 강릉 mbc 라디오에도 홍보 차원에서 나가는 등 여러모로 학과 홍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현재 입시철이에요. 학과장으로서 학과가 부흥했으면 하는 마음이 가장 크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어요. 가슴 한 구석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면 언제든지 강릉영동대학교 실용음악예술과의 문을 두드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강릉영동대학교 2024학년도 신입생 모집 일정 -
안지인 10-01 06:00
[색소폰, 흩어진 기억을 찾아서] 장인표 연주자가 말하는 그때 그 시절
한국 6,70년대에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곳의 풍경은 어땠을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빛바랜 듯 서글픈 그 시절에 대한 감상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열정이었고, 꿈이었고, 사랑이었기에 가슴 아픈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전쟁과 해방을 겪으며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그로 인해 피어난 미8군에서의 한국 대중가요 전성기는 우리 음악의 뿌리이자 우리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장인표 악단장은 1960년도에 미8군을 거쳐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그룹 ‘돈키호테’ 등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다. 이후 경찰 악대에 특채로 들어가면서 대통령상 수상, 단장 및 지휘자 역임, 국제대회 참가, 세션 활동 등 화려한 이력을 보유한 그에게 경찰악대에 들어가기 이전의 활동 시기에 대해 이야기 들어봤다. 한국에는 미8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8군쇼는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던 무대였다. 1953년 7월, 휴전과 함께 전국 각지에 주둔하는 캠프에 있는 클럽을 주 무대로 미군위문협회는 공연단을 보내 위문 공연을 펼쳤다. 마를린 먼로, 냇 킹 콜과 같은 스타들을 보내다가, 이후 비싼 몸값을 지불하는 게 어려워져 한국의 악단들을 무대에 세우기 시작했다. 이후 1958년 즈음 미8군 쇼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상공부 등록 허가제로 제도가 바뀌게 된다. 당시 쇼 공급회사의 허가 조건은 미8군쇼 등록 단원들로 구성된 쇼단이 다섯 개 이상이어야 했는데, 이로 인해 각자 활동하던 쇼단들이 인력을 합쳤고 그중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이 화양이다. 화양은 미8군쇼 공급회사의 대표격으로 전성기 때는 5백여 명의 단원이 소속되어 있던 대행업체다. 화양은 당시 미8군 무대에서 〈베니김 쇼〉를 진행해 인기를 얻었는데, 이어 화양과 쌍벽을 이루는 유니버설 흥업을 비롯해 고려, 공영, 극동, 동일, 대영, 삼진, 아주 등 미8군쇼 공급 대행업체가 잇달아 생겨났다. “61년도에 미8군에서는 하우스 밴드라고 해서 문산, 포천, 부평, 군산, 평택 등 하우스 밴드가 5인조로 활동을 했습니다. 종로에 화양이라는 회사가 있어요. 거기 모여서 당신은 어디로 가라고 배정해주면 한 달마다 각지에 다니면서 공연을 했어요. 공연장 근처에서 하숙하고…. 그걸 몇 년씩 했죠. 희로애락도 있고요. 거기서는 음악이 두 가지 분류였어요. 백인이 좋아하는 컨트리 송, 흑인이 좋아하는 소울 음악. 그래서 폴카나 컨트리 송을 연주하면 백인들이 춤추면서 좋아했죠. 그런데 흑인들은 싫어했어요. 그래서 컨트리 쇼는 흑인 클럽에는 부킹이 잘 안돼요. 저는 흑인 클럽에서 소울 음악으로 몇 년 했어요. 패키지 쇼는 캄보밴드(소규모 밴드) 형식으로 해서 가수 한두 명 데리고 했죠. 그때는 키브라더스 윤항기 씨가 백인들한테는 최고의 인기를 얻었어요. 엘비스 프레슬리, 루이 암스트롱 같은 가수의 노래를 하면 똑같이 해요. 그러면 미군들은 “윤항기 베리 굿” 하면서 모두가 일어나 “치얼스(Cheers)!”했죠. 그분은 트럼본으로 칙칙폭폭 기차 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그런 기술을 부려서 굉장히 많은 인기를 가졌죠.” 1961년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까지의 통상적 통금 시간은 0시부터 4시까지였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나면 밤 12시부터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영업을 했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고고클럽’이다. 클럽의 문이 열리면 많은 이들은 근처 해장국집으로 내달리며 열정을 식혔는데, 이러한 모습은 지금의 한국 밤 문화와도 많이 닮아있다. 밤이 끝나도록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 공간은 그야말로 터질 듯한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특히, 당시 최초의 고고클럽으로 개장한 ‘닐바나’는 술과 라이브 연주에 어우러져 무대에서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었고 일급 그룹사운드들의 무대였으며, 장안의 내로라하는 멋쟁이 선남선녀들이 춤을 추던 댄스 공간이었다. “70년대 넘어서면서 카바레가 많아졌어요. 저는 윤항기 씨와 그룹사운드 쪽으로 해서 퇴계로에 닐바나 라는 클럽에서 공연을 했어요. 2층, 3층으로 나뉘어서 두 개의 클럽으로 돼있었는데, 공연을 한번 하면 새벽 4시까지 해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죠. 2층, 3층을 오가면서 윤항기 씨와 키브라더스로 활동을 했고 당시 데블스라는 그룹사운드도 같이 활동했었죠. 그때 즈음부터 그룹사운드들이 많이 생겨났고, 고고클럽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하던 사람들이 윤항기, 윤수일 등 다양한 그룹사운드와 가수들이 등장했어요. 조용필도 그중 하나였는데, 고고클럽에서 조용필이 노래를 하면 손님이고 아가씨들이고 짜릿한 감정으로 손뼉을 치고 그랬어요. 노래를 아주 잘했어요. 대성하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어떤 연유로 부산으로 갔죠. 당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부산서부터 무섭게 치고 올라오더라고요. 그렇게 노래를 잘하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가 된 거죠.” “고고클럽에는 70년대 초에서 80년대 넘어가기 전까지는 국산 노래를 안 했어요. 외국의 팝 음악만 하고 국산 노래하면 과장된 말로 좀 저질이라고 했어요(웃음). 조용필〈돌아와요 부산항에〉,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조경수 〈행복이란〉 등 그렇게 80년대 넘어가면서부터 그룹사운드가 자기 노래를 해서 나오기 시작한 거죠. 함중아 〈안개속에 두 그림자〉, 최헌 〈검은나비〉, 〈앵두〉, 〈오동잎〉 등 많이 했는데, 아직은 돌아갈 나이 아닌데 몇 년 전에 안 좋아져서 돌아갔어요. 좋은 친구가 먼저 가니까 아쉽지. 저는 당시 미8군에서 나와서 키보이스라는 그룹으로 활동했어요. 윤항기 외 5명이 영어로 된 음악을 번안해서 부르다가 〈바닷가의 추억〉, 〈해변으로 가요〉같은 곡들이 유명해졌죠. 그런 걸 했어요. 지금은 고인이 된 차중락 씨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번역해 불러서 아주 히트를 쳤죠. 그분의 사촌 되는 분이 차도균 씨에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오히려 차정남 씨보다 백배 이상은 더 불렀을 거예요. 차도균 베이스, 윤항기 드럼 그리고 김홍탁 씨가 기타를 쳤고 옥성빈 씨가 키보드를 연주했던 게 1기 키보이스였어요. 그러다 또 각자들 헤어져 나가는 거예요. 2인조로 했다가 7인조로도 했다가…. 그다음에 윤항기 씨는 키브라더스라는 새로운 팀으로 미국 팝송 번안만 했죠. 70년대에는 고고클럽 닐바나에서 윤항기 씨와 같이 활동했죠. 나이트클럽에서 쭉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제 나름대로 돈키호테라는 그룹을 만들었어요. 많을 때는 7명, 적을 때는 6명 그렇게 해서 고고클럽과 나이트클럽만 다녔어요. 저는 카바레에서는 사실 잘 안 했어요. 어쩌다가 해달라고 하면 하고 방송할 때 엑스트라로 좀 가고 그랬죠.” 스윙이나 스탠더드 팝, 컨트리 등을 연주했던 1950년대와 달리 60년대에는 비틀스의 등장이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다. 팝 음악의 역사는 비틀스의 등장 전과 후로 나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문화적 파급력이 상당했던 지라 그 열풍은 곧 한국에 상륙했고 젊은이들은 그들의 음악, 문화, 복장 모든 것에 열광했다. “당시에 윤복희 씨가 미국에서 들어와서 미니스커트를 입었었는데, 그것도 경찰들이 몇 센티 위로는 안 된다고 검거하고 그랬어요. 또 비틀스가 유행을 했잖아요. 그래서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면 거의 머리들을 다 길렀죠. 저도 마찬가지로 길렀는데 경찰한테 걸렸지 뭐예요. 머리 뒤에를 이발기로 밀어놓아서 그게 얼마나 창피했는지(웃음)….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데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과거를 회상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장인표 악단장은 핸드폰을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찾았다는 듯 화면을 들어 내밀었다. 화면 속에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들이 앞을 응시하며 밝게 웃는 모습의 사진이 있었는데,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가들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멋쟁이인 모습이었다. 한국 대중음악 1세대로 불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 또한 어려 있었다. 장인표 악단장은 코로나로 인한 위험성으로 선후배들을 위한 모임을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커 보였다. 그러고는 사진 속의 인물들을 한 사람씩 호명하며 덧붙였다. “나는 그래요. 음악으로 살아오면서 힘들다고 하지만, 자식들 대학교 다 보내고 음악을 해온 거에 미련이 없어요. 지금도 가끔 만나는 과거 사람들 그러니까 1세대 선후배들과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도 못하고 대접도 못해드리는 게 참 아쉬워요. 기존에 선후배들 모임을 150명씩 3년을 해왔거든요. 흘러간 6, 70년대 미8군에 계셨던 분들은 다 여기 계세요. 이 중에 돌아가신 분도 있고 80, 90 넘은 분도 계시고요. 이동기, 최성준, 최용익 1세대 최고의 테너 색소폰 김수열, 피아노 오르간의 박금석 씨, 베이스 최근명 씨, 그리고 이판근 씨라고 아주 유명한 분이죠. 얼른 코로나가 지나가야 되는데….”
투데이 HOT 이슈
- 서울재즈쿼텟 2023 콘서트
- 서울재즈쿼텟(SJQ)이 돌아왔다. 지난해 해체 25년만의 재회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끝낸데 이어 그 실황을 담은 LP 발매 기념으로 11월 19일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1년 동안 더욱 농익은 멤버들의 호흡이 무대 위에서 폭발했고, 한국형 재즈의 미래를 그린 창작곡으로 신선함을 더했다. 각각 수십년 경력의 거장들은 이번 공연을 통해 확실한 메시지를 던졌다. ‘고여 있기보다 개척하겠다, 계속 걸어가겠다.’ 간결하지만 분명한 메시지였다. 글 l 박은주 기자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 서울재즈쿼텟의 포스터가 다시 걸렸다. 지난해 감동의 재회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반가운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이들의 재결합은 ‘1천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운 뒤 앙코르 콘서트까지 이어졌다. 그게 벌써 1년 전이다. 그 동안 서울재즈쿼텟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중략- 서울재즈쿼텟은 앞으로도 다양한 창작곡을 통해 한국의 흥을 더한 K-재즈를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연주력을 갈고 닦은 뮤지션들이 이제는 신로를 개척하겠다고 나섰다.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영화 ‘인턴(The Intern)’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70대의 주인공인 벤이 스타트업에 시니어 인턴으로 지원하며 하는 말이다. “뮤지션에게 은퇴란 없다더군요.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음악이 흐르는 한 멈추지 않는다고요. (I read once, Musicians don’t retire. They stop when there’s no more music in them)” 서울재즈쿼텟의 재즈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포토슬라이드1 / 3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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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브의 도약, ‘시’에서 해답을 얻다
좋은 음정은 색소폰 연주자의 꿈이다. 남다르게 좋은 소리를 원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공부 중 하나가 음정이다. 90년대 중반 파리에서 색소폰 기초를 배웠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8도의 도약을 통한 음정 훈련이었다. 같은 이름을 지닌 여덟 계단 위의 음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인데, 처음에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옥타브(Octave)의 관계를 아는 것은 안정적인 연주의 시작이다. 저음 ‘도’에서 중음 ‘도’로 그리고 중음 ‘도’에서 고음 ‘도’로 도약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일지 싶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프(JUMP)’의 개념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중략- ‘시’의 도약은 연주자가 추구하는 장르를 결정하기도 한다. 또한 장르에 따른 기법의 차이가 가장 도드라지는 음이 고음 ‘시’이다. 고음 ‘시’의 음색을 들으면 어떤 지도를 받았는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장르가 달라도 고수들은 고음 ‘시’의 안정감을 보여준다. 도약의 개념을 알고 연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로 고음 ‘시’가 도약 후 담장 멀리 날아가 버리지 않았다. 때로는 조금 작은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도약의 베이스인 저음이 좋았다. 또한 안정적인 높이에서 점프했다. 그리고 점프 후 도약의 정점도 예측했다. 심지어 낙하하기 직전의 순간에 잠시 멈추듯 했는데, 정말 예술적인 그 순간은 슬로비디오를 통해서 만나는 멋진 주윤발의 미소를 연상케 했다. 중저음 ‘시’ 음에서 고음 ‘시’ 연습이 고수로 가는 길이 아닐지 싶다. 그리고 포인트가 있다면 연습을 항상 녹음해서 들어보고 분석하는 것이다. 고수가 되기 전까지 특히 고음 ‘시’ 음의 날카로움과 필요 이상의 강세를 녹음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 중저음 ‘시’와 고음 ‘시’의 도약에 더 집중하면, 날아가 버리는 고음이 아닌 멋지게 날아오르는 고음을 알게 될 것이다. 2023년의 당신의 도약이 2024년 새해에는 아름다운 비상(飛上)이 되기를 기원한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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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하면 돈 버는 이병경의 색소폰 관리법] 실버 색소폰의 특징과 관리법은?
글·사진 l 이병경 이번 호에서는 ‘은색(실버) 색소폰’의 특징과 관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중략- 실버 악기는 시각적으로 밝기 때문에 흔히 “실버는 소리가 밝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작 공정을 설명해 드린 것처럼 실버는 소리가 무겁고 밝은 소리보다는 어두운 소리를 냅니다. 소리의 판단은 주관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특징을 알고 방향을 잡으시면 되겠습니다. 실버의 또 다른 대표적 특징은 변색입니다. 관리를 잘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은 피할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실버를 잘 관리할 수 있을지 관리적인 부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공기 노출을 최소 2. 사용 후 수분 제거 3. 은 세척제로 변색 제거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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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하면 돈 버는 이병경의 색소폰 관리법] 가을철 적정한 온도와 습도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일교차가 심해지는 계절에 소중한 내 악기를 어떻게 관리할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는 온도와 습도가 바뀌고 다양한 문제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 됩니다. 글·사진 l 이병경 ●습도 점검 ●부품 점검 ●케이스 건조 ●정기 점검 <환절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 1. 키 소음 2. 건조해진 날씨로 코르크, 펠트 떨어짐 현상 3. 패드 건조함으로 인한 소리의 변화 ▶칼럼 전문은 월간색소폰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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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의 두께가 연주자의 실력은 아니다”
마우스피스, 리드, 리가처를 색소폰 삼우(三友)라 한다. 없어서는 안 될 정말 중요한 친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우스피스와 리드는 연주의 장르를 결정한다. 재질과 제조 방법 그리고 사이즈와 형태에 따라서 조금은 다른 소리가 난다. 그래서 사용하던 마우스피스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리드까지 바뀐다면 자신의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연주를 만나게 된다.색소폰 삼우 중 으뜸을 꼽는다면, 리드(Reed)라고 주저하지않고 말할 것이다. 연주의 차이는 물론이고 연주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중에 판매하는 다양한 리드를 써보았다. 그것은 더 좋은 리드를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새로운 제품에 대한 호기심이 컸기 때문이다.반도랜(Vandoren), 리코(Rico), 라보즈(LaVoz), 마르카(Marca), 다다리오(D’Addario), 레제르(Légère), 피브라셀(Fibracell), 파이버리드(Fiberreed),리고티(Rigotti), 글로탕(Glotin), 브랑쉐(Brancher), 바리(Bari), 알렉산더(Alexander), 우드스톤(WoodStone), 에이더블유(AW), 프랑스와 루이스(Francois Louis), 셀마(Selmer), 오메가(Omega), 실버스테인(Silverstein),포레스톤(Forestone) 등 나열한 리드에서 또 세분화하면 더 많은종류가 나온다. 예를 들어 반도랜(Vandoren)에서도 트래디셔널(Traditional), 자바(Java), V16, V12, V21, ZZ 등 다양하다. 거기에다 사이즈까지 따지면 족히 30종 이상을 경험하게 된다. 리드는 브랜드와 모델도 중요하지만, 두께를 말하는 리드 호수에 따라서 음색이 달라지기도 한다. 또한 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리드도 경험할 수 있다. 주관적 견해이지만 리드의 두께가 연주자의 실력은 아니다. 자신과 맞지 않는 리드를 극복하려는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색소폰은 정말 비합리적인 악기인 것 같습니다. 플루트나 트럼펫은 마우스피스 하나로 동일한 소리를 낼 수 있는데, 색소폰은동일한 브랜드의 같은 치수 리드를 사용해도 매번 다른 소리가 나거든요” 나에게 색소폰을 배웠던 취미 생이 종종하던 얘기다. 플루트는 잘 모르겠지만, 트럼펫 마우스피스는 경험이 있다. 그 또한 항상 한결같은 소리가 아니다. 피스는 그대로이더라도 연주자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졌다. 다만 브라스 윈드(Brass Wind)와 우드 윈드(Wood Wind)의 차이로 본다면 리드를 사용하는 우드 윈드가 조금 더 편차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평균적이지 않은 리드의 품질에 대한 불만이 비합리적인 악기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영화 〈뷰티 인사이드(The Beauty inside)〉를 기억한다. 배우 한효주의 상대역으로 123명을 등장시켜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다. 여자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18세 이후 자고 일어나면 매일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희소병이 있었다. 조금은 황당하고 독특한 설정이었지만, 멋진 남자 배우가 수없이 바뀌면서 만약 내가 여자 주인공이라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바뀌는 상대로 인해서 혼란스러워하는, 결코 부러울 수 없는 여자 주인공의 표정이 영화 속으로 더 빠져들게 했다. 문제는 그녀의 대상이 남자만이 아닌 동성으로 때로는 아이로 그리고 노인으로 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결국 심한 혼란을 겪는 여자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공감하고 말았다. 물론 매일 바뀌는 애인처럼 리드의 변화가 크다면 연주자 역시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적당히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매력적인 변화라면 묘한 호기심도 생길 수 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두께가 얇은 리드로도 충분히 힘이 느껴지는 고음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무대의 규모가 큰 경우에는 평소라면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용도로나 썼을 법한 두꺼운 리드를 다스릴 수 있었다. 동일한 리드에서 느껴지는 변화는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떠올리게 했다. 색소폰의 매력에서 리드가 차지하는 부분은 매우 크다. 연주가 바뀌면 또 다른 연인이 나에게 나타나듯 달라진 리드를 만난다. 크게 당황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며, 즐김이 리드에 들어 있음도 알게 된다. 다행스러운 한 가지는 리드는 최소한 아이와 할아버지로 변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리드를 다스리는 능력이 생기면 오히려 내가 원하는 판타지를 리드에 담는 설정도 경험할 수 있다. 색소폰 입문자라면 공감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만큼 색소폰 리드를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월도 필요하고 고민과 공부를 반복하며 배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리드를 아주 조금 알기까지 30년이 걸렸다. 필자 역시 입문 시절에는 리드 두께의 차이가 무엇인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전문 연주인은 자신이 사용하는 리드의 특성을 잘 안다. 리드의 편차가 될 수 있는 대로 작은 것을 고르는 능력도 있다. 리드를 알고다스린다는 것이 색소폰 연주의 경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리드의 다스림은 여전히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요즘 리드의 편차가 가장 작다고 말하는 합성 리드 또는 플라스틱 리드에 대한 수요도 커지고 있다. 좋은 갈대가 고갈되는 현실에서 어쩌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점점 발전하는 제조 기술 덕분에 갈대 리드와 차이를 바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한마디로 리드는 정답이 없다. 사람마다 지닌 조건이 다르기에 어떤 브랜드의 특정 리드 두께를 강요할 수도 없다. 그래서 다양한 리드를 써보라고 말한다. 비용이 든다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과 잘 맞는 리드를 찾는 것은 색소폰을 알아가는 큰 재미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리드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으로서 리드 활용법을 남긴다. - 새 리드 버리지 말고, 아주 조금 다른 성향의 마우스피스를 활용하자 예를 들어서서 파리 셀마 C* 모델과 반도랜 AP3 마우스피스가 그 방법이다. 셀마 피스에서 답답했던 리드가 반도랜 제품에서 밝은 소리로 표현되는 것을 활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리드의 품질에 따라서 다소 차이는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마우스피스를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면 멀쩡한 리드를 버리는 일이 줄어든다 . - 연주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리드의 두께를 선택하자 특히 독주가 아닌 합주의 경우 평소 사용하던 리드가 뒤집어지는 현상도 발생한다. 전문 연주인의 경우 이 또한 다스리기에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간의 규모와 리드의 두께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고, 쉽게 다스릴 수 없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두꺼운 리드의 사용도 좋은 해결 방법이다. 정말이지 리드는 정답이 없다. 그 매력을 찾는 것은 연주자의 몫이다. 어떤 리드를 만나든 한결같을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 그것이 리드 악기를 선택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본다.
Item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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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상의 마우스피스 맛보기 46
노릇노릇 잘 구워낸 삼겹살을 멜젓에 콕 찍어 먹으면 입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멜젓의 풍미가 먹는 즐거움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그러나 함께 식사하는 이들과 담소를 나누다 굽는 시간을 놓치면 제아무리 맛있게 숙성시킨 고기도 질기고 딱딱해져 맛을 즐길 수 없게 변해 버린다. 야베스 마우스피스는 고기가 맛있게 구워지는 알맞은 시간을 찾듯, 테너 색소폰의 꼭 필요한 음색을 놓치지 않고 크레센트 마우스피스 안에 잘 구워냈다. 글 | 구민상 색소포니스트 sax019@hanmail.net “야베스 (Jabez)”는 [용문TV]로 알려진 이용문씨가 만든 브랜드며 이미 이전에 테너 마우스피스 CT-1 (Contemporary) 모델과 앨토 마우스피스 CA (Contemporary)를 소개한 바 있다. 모델별로 마우스피스마다 음색의 컨셉과 목표가 확실하여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늘 소개하는 마우스피스는 야베스에서 그동안 보지 못한 디자인으로 크레센트 (Crescent)라는 이름을 가지고 올해 새롭게 출시된 신모델이다. 첫 모델을 선보인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야베스의 새로운 마우스피스라 궁금증이 더해지고 모든 마우스피스를 하나하나 이용문씨가 직접 다듬고 마무리하는 핸드 피니쉬 방식으로 만들어져 기대감이 더해진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2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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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민상의 마우스피스 맛보기45
가수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면 그 누구도 그녀가 가진 높은 음악적 재능과 감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만큼 가수로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 아이유가 어느 날부터 이지은이라는 본명으로 배우라는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했고 그의 연기를 본 시청자 대부분과 팬들은 또 다른 매력에 박수를 보냈다. 색소폰의 셀마 (SELMER) 마우스피스는 그동안 클래식 음악에서 인정받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셀마에서 클래식이 아닌 재즈를 주 무대로 하는 스피릿 (Spirit)이라는 마우스피스를 만들었고 연주자에게 얼마만큼 박수를 받을지 함께 살펴보자. 글 | 구민상 색소포니스트 sax019@hanmail.net 셀마 (SELMER)에서 재즈 (Jazz)라는 이름의 마우스피스를 만든 적은 있지만, 하드러버가 아닌 메탈 (Metal) 재질로 아주 오래전에 만든 모델이었다. 재즈 모델은 베플 (Baffle)의 형상과 챔버 (Chamber)의 디자인이 오늘 소개하는 스피릿 (Spirit) 모델과는 전혀 다르기에 완전히 다른 음색을 가졌으며 이미 오래전에 단종되었다. (셀마 재즈 메탈 마우스피스는 본지 2023년 6월호 Vol 84 참고) 재즈 모델의 단종 이후, 2010년경 셀마는 유명한 프랑스 재즈 연주자 피에릭 페드론 (Pierrick Pedron)과 함께 협업을 통해 스피릿 마우스피스를 제작하였고 재즈 연주자를 위한 마우스피스로 오로지 알토 색소폰 마우스피스만 출시되었다. ▶기사 전문은 월간색소폰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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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Inside] 구민상의 마우스피스 맛보기 43
스티브 잡스가 만든 사과폰 1세대는 혁신의 아이콘이 되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후속 모델 출시를 거듭하며 14세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사과폰이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최초 1세대 폰에 쏟은 열정과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지금의 사과폰처럼 색소폰 마우스피스 회사로 우뚝 선 테오 와니 (Theo Wanne)가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첫 번째로 만든 마우스피스인 암마 (AMMA) 모델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제 테오의 첫 작품이 어떤 이유로 연주자에게 사랑받은 것인지 알아보자. 글| 구민상 색소포니스트 sax019@hanmail.net 우리나라에선 “디오 웨인”으로 더 많이 알려진 마우스피스 제작자 “테오 와니”는 이미 2019년 4월호에 테너 마우스피스 칼리 (Kali) 모델을 소개하며 언급한 적 있다. 오늘 소개하는 암마 (AMMA)라는 마우스피스는 테오 와니 (Theo Wanne)에게 의미 있는 모델이다. 유명한 연주자의 마우스피스를 다시 정교하게 다듬는 리페이싱 (Refacing)으로 유명하던 테오가 2004년 처음 직접 손으로 30개 정도 만든 마우스피스가 [암마]의 시작이었다. 이후 2005년 투자를 받아 2007년 테오는 그의 형 톰 와니 (Tom Wanne)와 함께 주식회사 Wanne, Inc. 등록과 함께 트루 라지 챔버 (True Large Chamber)를 포함한 5개의 특허를 출원했고 이때 테오 와니의 이름을 걸고 첫 판매를 시작한 마우스피스가 바로 [암마] 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밀하지 못한 기계 작업으로 인해 직접 손으로 베플을 비롯한 여러 곳을 테오가 직접 깎아 마무리하는 생산방법이었으나 2009년부터 CAD 기술이 발전하여 더는 핸드 피니시 (Hand Finished)가 필요 없어져 오로지 CNC로 만들어졌다. 마우스피스는 금도금, 황동 및 빈티지 세 가지 마감을 선택할 수 있고 이후 2012년까지 제작되다가 후속 모델에게 자리를 내주며 단종되었다. [암마]의 외관은 테오 와니의 마우스피스답게 아름다움을 넘어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제일 먼저 보이는 바디의 정 중앙에 테오 와니의 이니셜 W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 사진1 그 아래 생크에 있는 링 위쪽으로 테오 와니 본인의 이름인 [Theo Wanne]를 새겨 놓았다. - 사진 2 링 아래쪽에는 마우스피스의 모델명인 [AMMA] 가 있고 그 위 박스안에 마우스피스의 오프닝인 9호와 테오가 만든 마우스피스 고유 번호가 새겨있다. - 사진 3 사이드 레일 (Side rail)과 팁 레일 (Tip rail)은 상당히 얇고 고르게 만들어져 시선을 사로잡는다. - 사진 4 윗니가 닿는 바이트 플레이트 (Bite Plate)에는 테오 와니의 모든 마우스피스에 있는 로고가 음각되어 있어 누가 봐도 브랜드를 알 수 있고 마우스피스의 시각적인 고급스러움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다. - 사진 5 이제 마우스피스 성격을 보여주는 베플을 살펴보면 팁에서부터 짧고 매끄럽게 떨어지는 롤 오버 베플 (Rolled Over Baffle)로 재즈를 기반에 둔 전통적인 테너 색소폰 마우스피스 베플의 형상이다. - 사진 6 마우스피스의 안쪽을 보면 테오 와니의 특허인 동시에 독창적인 음색을 만들어 주는 요소 중 하나인 트루 라지 챔버 (True large chamber)가 엄첨 넓고 심지어 사이드 레일의 안쪽까지 확장해 넓혀놓은 것을 볼 수 있다. - 사진 7 테오가 만든 마우스피스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리버티 리가처 (Liberty ligature)라고 부르는 일체형 리가처로 바디 양 옆 하단에 홀을 뚫고 거기에 리가처를 연결하여 밸브를 돌려서 리드를 고정하는 방식이다. 리버티 리가처는 막상 써보면 마우스피스의 울림에 큰 저항을 만들지 않고 간단히 리드를 체결하여 편리함과 동시에 기능적인 우수함을 지녔다. 거기에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테오 와니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큰 부분을 담당한다. - 사진 8 [암마] 마우스피스에 리드를 결합하고 소리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안해졌다. 역시 테오가 만든 모든 마우스피스의 편안한 컨트롤 능력은 첫 번째 작품인 바로 [암마]에서부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불어본 중음역은 중심이 단단해 연주를 시작하면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암마]와 비슷한 베플의 형상을 가진 마우스피스나 심지어 더 높은 미디움 이상의 베플을 가진 마우스피스와 다양하게 비교해보면 실제로 [암마]의 볼륨이 더 크고 아울러 소리 직진 효과가 더 강할 때도 있다. 그만큼 볼륨에 여유 있고 깔끔한 전달력을 가졌기에 많은 음악 장르에서 활용도가 넓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전통 테너 마우스피스에서 늘 비교가 되는 오토링크와 비교해보면 더 오픈된 (Open) 사운드에 살짝 밝은 음색을 보이지만 볼륨을 높이면 더 넓게 오픈되어 밝은 음색이 크게 강조되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볼륨을 조금 낮추면 힘이 있고 단단하던 중심의 밀도가 살짝 옅어지며 편안하고 다른 악기의 소리에 함께 녹아드는 아름다운 음색이 된다. 마치 [암마] 마우스피스는 넓은 초원을 빠르고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검은 흑마의 강한 모습과 아울러 달리기를 마치고 한가히 풀을 뜯는 여유로운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아무래도 소프라노나 알토 색소폰보다 상대적으로 테너 색소폰의 음역이 낮기에 같은 고음에서 느낌을 전달하는 표현력도 조금은 약해진다. 여기에 볼륨까지 만족스럽지 못하면 고음에서 답답함이 느껴지고 그 순간, 집중력이 분산되어 연주에 대한 스트레스가 생긴다. 그러나 [암마]의 볼륨은 고음에서도 호흡을 밀어 넣으면 소리는 막힘없이 시원하게 쭉 뻗어나가 답답함을 느끼기 어렵다. 비슷한 마우스피스로 같은 라인의 솔로를 비교 연주해보면 확실히 [암마]의 솔로 라인이 관객에게 좀 더 또렷하게 전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같은 영화를 작은 사이즈의 TV로 시청하다가 55인치 이상 대형화면 TV로 보면 모든 것이 크고 선명하게 보여 감동이 더 커지는 효과와 비슷하다. 물론 소리의 직진성만을 이야기한다면 베플이 높은 하이 베플 마우스피스와 비교해 살짝 떨어지지만, 음의 선명도가 좋아 직진성에 대해 아쉬움은 적다. 그리고 볼륨이 크다고 하여 딱딱하거나 유연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오해는 금물이다. 고음에서 유연성이 높아 연주자의 의도대로 부드럽고 매끄럽게 노래할 수 있다. 고음뿐만 아니고 더 높은 알티시모 (Altissimo)의 영역도 볼륨이 함몰되는 음 없이 편하게 올라가 알토 색소폰의 높은 고음 영역까지 쉽게 연주되어 만족감을 높인다. 이제 [암마]의 저음을 보면 중음역과 마찬가지로 꽉 채워진 음색과 확실한 무게감이 실린 음색이 전달된다. 거기에 볼륨을 키우면 쉽게 주변을 압도하는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오고 동시에 동굴과 같이 어둡고 깊은 테너의 소리가 퍼져 나간다. 이미 중, 고음에서 검증된 편안한 조종성은 저음까지 이어져 더 자유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만든다. 여기서 힘을 빼고 서브톤 (Sub Tone)을 만들어 보니 꽉 채워진 무게감이 순간 가벼워지며 풍성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안겨준다. 서브톤의 부드러움도 약한 효과부터 극한의 효과까지 여러 단계로 만들어 지는데 [암마]는 마치 빌딩의 지하 주차장을 내려갈 때 B1, 2층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지하 3층으로 바로 내려간 것처럼 순간 더 깊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색소폰 연주에서 소리 마지막 부분에 약간의 호흡을 남겨주면 잔향이 남아 듣는 이들에게 편안한 여운을 만들어 주는 기술이 있다. 이런 효과는 마우스피스에 따라 잔향이 짧게 남거나 불안정하게 뚝 끊기기도 하는데 [암마]는 큰 불편함 없이 호흡에 따라 쉽게 잔향을 남겨주는 여유마저 있다. 이미 테오 와니의 마우스피스를 접해본 구독자분들은 예상한 대로 이번 달의 주인공인 [암마]의 오프닝 호수는 9호지만 실제 체감은 8* 정도의 느낌으로 전해진다. 많은 데이터로 완성한 테오만의 페이싱 커브 (Facing Curve)가 주는 편안함의 결과이다. 그리고 옵션이긴 하지만 리드를 잡는 플레이트 (Plate) 역시 빈티지 (Vinted ), 티타늄 (Titanium), 스테인리스 (Stainless Steel), 구리 (Copper) 재질의 4가지가 있으니 본인의 성향에 맞게 골라 사용하면 약간의 도움이 된다. 빈티지는 따뜻하고 어두운 음색, 티타늄과 스테인레스 스틸은 강하고 밝은 음색 그리고 구리 압력판은 기본적인 셋팅으로 어두운 음색을 제공한다. 그러나 플레이트 교체만으로 음색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하는 분은 없으리라 믿는다. 단지 마우스피스 음색에서 본인이 원하는 방향성을 강조하거나 살짝 아쉬운 부분을 채워주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맞다. 마지막으로 동봉되어있는 두 개의 드라이버는 리버티 리가처의 위치 변화와 플레이트를 교체할 때 사용하는 전용 공구이고 리드 리플레이서 캡 (Reed Replacer Cap)은 리드를 보호하는 목적이 아닌 사용하지 않을 때 끼워 마우스피스의 팁을 보호하는 캡으로 활용도가 높다. - 사진 9 수많은 테너 빈티지 마우스피스 데이터를 기반으로 테오가 만든 첫 번째 마우스피스 [암마]. 분명 재즈를 기반으로 만들었지만, 이상하리만큼 모든 스타일 (Style)의 음악에 잘 녹아드는 마법을 가졌다. 이 마우스피스는 매우 빠른 반응과 쉬운 컨트롤을 자랑하고 중간 정도의 밝은 음색을 가지고 있지만 테오의 "True Large Chamber"라 불리는 큰 사이즈의 챔버와 합쳐지며 연주자의 성향에 따라 따뜻하고 풍부하며 때론 꽉 찬 음색과 강력한 힘을 가진 새로운 차원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 아쉽게도 이 멋진 작품이 이미 단종되어 이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암마] 마우스피스 이후에 만들어진 다양한 테너 색소폰의 음색에 새로운 길라잡이 역할을 했음에 박수를 보낸다. <알립니다> 본지 9월호 책자에 실린 해당 코너의 메인 사진이 다음과 같이 잘못 편집되어 독자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 온라인 페이지의 첫 번째 사진이 이 기사의 본래 메인 사진이며, 책자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본지의 착오로 지난호 사진이 잘못 실렸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혼란을 드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사진 A는 지난 8월호의 메인 사진으로, 이번 9월호 책자에 잘못 편집되었습니다. 이에 사진 B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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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Inside] 구민상의 마우스피스 맛보기 42
어느 여름날, 뜨겁지 않은 오후 햇살과 잔잔한 바닷바람에 이끌려 해변을 따라 행복한 산책을 즐겼던 적이 있었다. 늦은 저녁 무렵이 되니 해변 산책의 후유증으로 목뒤가 따갑고 팔과 다리는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강하지 않다고 생각한 햇볕에 피부는 그을려 ‘썬 번(sunburn)’이 일어날 만큼 그날의 태양은 나의 예상보다 강렬했고 뜨거웠다. 오늘 소개하는 나디르 DG 비밥 앨토 마우스피스도 처음부터 엄청난 불을 뿜어내지 않지만 연주하는 내내 충분한 열기로 공연장을 뜨겁게 달구며 관객의 귀를 사로잡기 충분한 멋진 친구이다. 글| 색소포니스트 구민상 sax019@hanmail.net 데이브 과데라(Dave Guardala)가 만든 마우스피스는 테너 색소폰의 전설인 마이클 브렉커(Michael Brecker)부터 빌 에반스(Bill Evans), 톰 스콧(Tom Scott), 브렌포드 마샬리스(Branford Marsalis)까지 수많은 연주인이 애용하며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데이브 과데라는 두 회사로 나뉘는데 하나는 데이브 과데라 사망 이후 미국에서 생산하는 데이브 과데라 모델과 두 번째 과데라로부터 데이터와 판권을 받은 독일의 나디르 이브라히모글루(Nadir Ibrahimoglu)가 만든 또 다른 데이브 과데라(이하 DG로 약칭) 모델이다. 미국에서 만드는 DG 마우스피스는 정확한 수치를 넣어 CNC로 제작하는 레이저 컷팅 방식이고 독일에서 만드는 DG 마우스피스는 CNC 제작 후, 직접 손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는 핸드 피니시드(Hand Finished) 모델과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깎아 만드는 핸드메이드(Handmade) 두 개의 모델로 나누어 제작하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비밥 앨토 트레디셔널 Bebop Alto Traditional – 이하 비밥 앨토로 약칭] 마우스피스는 데이브 과데라가 만들었던 트레디셔널 비밥(Traditional Bebop) 모델을 독일의 나디르가 손으로 직접 깎아 부활시킨 핸드메이드 마우스피스이다. 한쪽 면에 마우스피스 정보가 있는 자주색 종이상자를 열면 그 안에 두툼한 가죽 파우치가 있고 마우스피스와 리가처 그리고 플라스틱 마우스피스 캡이 있다. - 사진 1 마우스피스 바디(Body)의 위쪽에 모델명인 ‘Bebop/Trad’이 새겨있고 그 아래 생크에는 핸드메이드를 보여주듯 이 마우스피스의 일련번호가 함께 각인되어 있다. - 사진 2마우스피스 생크 하단에는 데이브 과데라의 약자인 ‘DG’와 ‘Made by N’이라고 써놓아 미국의 모델과 차별을 두었다. - 사진 3 그리고 윗니가 닿는 비크(Beak)에는 데이브 과데라 마우스피스의 상징과도 같은 ‘DG’ 마크가 바이트 플레이트(Bite Plate)에 멋지게 자리 잡고 있다. - 사진 4 그러나 최근 생산에서부터 원가 절감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부분이 삭제되어 소리와는 상관없지만, 디자인적인 면에서 개인적인 아쉬움이 든다. 마지막으로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생크의 안쪽에 손으로 직접 새긴 알 수 없는 번호가 있는데 [사진 2]의 일련번호와는 다른 알파벳과 숫자로 나디르 본인이 만든 마우스피스의 전체 제작 번호라 추측된다. - 사진 5 테이블은 상당히 부드럽고 매끄러워 리드와의 결합에서 충분한 밀착력을 가진다. - 사진 6그 위로 연결된 사이드 레일(Side Rail)은 얇은 두께로 좌우 대칭의 균형이 좋고 팁 레일(Tip Rail)까지 마무리가 잘 되어있다. - 사진 7베플(Baffle)은 짧은 미디움 높이의 베플에 살짝 각이 진 모양으로 되어있고 마우스피스 안쪽도 더 넓은 라지 보어(larger bore)로 제작되었다. - 사진 8이 마우스피스의 특이한 점은 오프닝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예전부터 데이브 과데라는 각 모델별로 한가지 팁 오프닝으로만 제작했기 때문이다. 나디르 역시 그 제작 방식을 고수하여 [비밥 앨토] 모델의 팁 오프닝(Tip opening)은 .080"로만 만들기에 굳이 팁 오프닝을 표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디르가 만든 [비밥 앨토]의 전체적인 외형은 심플하지만 테너 마우스피스 MB모델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디자인을 따르며 금도금(Gold-plated)으로 마무리되어 고급스럽고 강한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다. 제일 먼저 불어본 중음역은 글로 표현하기 좀 복잡한 음색이다. 보통의 볼륨까지는 은근히 부드러우며 매끄럽게 움직이더니 볼륨을 높일수록 까칠한 성격을 드러내며 직선으로 쭉 뻗어나간다. 이 변화의 폭이 다른 마우스피스에 비해 좀 더 크게 체감된다. 음의 중심부는 부드러움이 녹아있는데 외각으로 거친 면들이 분포되어 있어 두 가지 중 연주자가 어떤 것에 포커스(Focus)를 두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비밥 앨토]는 어두운(Dark) 음색과 밝은(Bright) 음색 사이에서 분명히 밝은 쪽 성향은 맞지만, 중음역은 리드와 연주자의 성향에 따라 변화의 여지가 꽤 있어 보인다. 마치 라면에 제조사의 정확한 레시피가 있지만,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 면을 더 익혀 부드러운 식감을 만들거나 덜 익혀 쫀쫀한 식감으로 요리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다른 하이베플 마우스피스와 중음을 비교하면 볼륨이나 직진 성향은 살짝 아래에 있으나 반면 부드러운 터치감은 우위에 있다. 이로 인해 비밥과 같은 빠른 속주에서 날카롭고 딱딱한 성질은 줄어 매끄러운 연주 라인을 얻는 효과가 생긴다. 나디르 [비밥 앨토] 마우스피스의 저음은 벨런스가 잘 잡혀 너무 무겁거나 거칠지 않고 적당한 무게감을 전해준다. 특히 강한 압력으로 밀어낼 때, 하이베플과 비슷한 형상을 보고 예상했던 파괴력이나 강한 음색이 아닌 중심이 단단한 탱탱볼 같은 탄력 있는 음색이다. 음이 끝까지 힘이 빠지지 않고 살아 있어 엣지(Edgy) 있고 충분한 타격(Attack)감을 줄 수 있기에 저음에서 에너지가 넘친다. 단, 저음과 중음역에서 호흡에 대한 저항감이 살짝 높아 친화력이 좋은 친구는 아니기에 색소폰을 갓 시작한 초보보다 충분한 훈련을 거친 연주자에게 권하고 싶다. [비밥 앨토]가 가진 중저음의 높은 저항감과 반대로 서브톤(Sub-Tone)은 어렵지 않게 표현되고 컨트롤 역시 어렵지 않다. 서브톤의 음색은 중음의 톡톡 튀는 음을 한 겹 부드럽게 감싸는 효과를 만들어 주고 저음에서는 당연히 부드러움도 더하지만, 공간감을 더 넓혀주어 풍부한 소리를 얻는 효과도 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서브톤의 음색은 연기처럼 가볍게 퍼지는 느낌보다 젤리처럼 말랑하지만 탱탱한 느낌이 강하다. [비밥 앨토]의 고음은 다른 하이베플 마우스피스와 비교해도 고음에서 볼륨에 대한 부족함은 없다. 다만 직진성이 줄어드는 변화가 있고 이로 인해 볼륨이 작다고 느끼게 할 때가 있으나 실제로 볼륨이 작은 것은 아니다. 음색은 중음과 같이 음의 전달력이 명확하고 또렷하다. 이번엔 하이베플과 상대적으로 반대인 로우베플 마우스피스와 비교하면 좀 더 무게감이 있어 깃털처럼 가볍게 노래하는 하드러버 마우스피스의 느낌보다는 권투 경기중 가볍게 주먹을 던지는 잽(Jab)처럼 약간의 힘이 실린 펀치력이 돋보인다. 거기에 볼륨을 높이면 잽에 이어 오른손 왼손의 주먹이 화려하게 직선으로 목표를 향해 날아가듯 뻗어나간다. 더 높은 알티시모(Altissimo)의 영역에서도 고음과 비슷한 느낌은 유지되고 전체적으로 하이베플의 시원함과 직진성은 가지고 하이베플과 로우베플 중간의 벨런스가 잘 잡혀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활용도가 넓다. [비밥 앨토] 마우스피스에 동봉된 리가처는 옆에 DG 로고가 쓰여있지만, 마우스피스 캡과 함께 GF 리가처(Ligature)의 것으로 Maxima-09M Gold 모델이다. 이 리가처는 연주자의 성향대로 위와 아래 양방향으로 사용 가능해 기본 리가처로 기대 이상의 성능을 가진다. - 사진 9, 10그리고 가죽 파우치는 요즘 흔히 보이는 인조 가죽이 아닌 순록의 가죽으로 만들어 오래 사용해도 질리지 않고 튼튼하며 마우스피스 보호뿐만 아니라 활용도가 높다. 이처럼 나머지 구성품의 품질이 좋기에 나디르가 만든 핸드메이드 DG 마우스피스에 만족감을 높여주고 더불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심어준다. - 사진 11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밥 앨토]의 팁 오프닝은 .080" 하나로만 만드는데 이는 대략 타 브랜드의 6*~7*호 정도이다. 그래서 본인이 사용하던 마우스피스의 팁 오프닝이 이와 비슷하다면 [비밥 앨토]로 바꿨을 때 상당히 큰 변화의 효과를 볼 수 있으나 컨트롤이 아주 쉬운 마우스피스는 아니기에 오프닝이 작거나 큰 팁 오프닝을 사용하는 연주자라면 리드로 커버하기에 부족함을 느낄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과거 데이브 과데라에 의해 만들어진 오리지널 [트레디셔널 비밥] 모델의 가격보다 싸지만, 나디르가 만든 [비밥 앨토] 역시 우리나라에서 백만 원이 훌쩍 넘는 몸값을 가져 많은 이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디르 홈페이지 광고 문구에는 캐논볼 에덜리(Cannonball Adderley)나 필 우즈(Phil Woods) 스타일, 그리고 락엔롤(Rock and Roll)부터 빅밴드 리드 앨토 색소폰 연주자까지 아주 넓은 음악 장르에 어울린다고 되어있다. 다른 건 수긍이 되지만 필 우즈의 팬이었던 필자에게 처음 몇 번을 비교하고 테스트해도 필 우즈의 음색과 너무 달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으나 테스트를 거듭하며 음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뉘앙스가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나디르가 다시 만든 [비밥 앨토]를 대략 두 달 동안 테스트와 연주에서 사용하며 아주 오랜만에 개성이 강한 마우스피스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베플의 형상은 과거 비밥을 연주하던 마우스피스와 다르고 음색의 시작도 역시 전통적인 비밥과는 차이가 있으나 연주를 거듭할수록 트레디셔널 비밥 마우스피스의 음색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남들과 다른 듯싶으나 의외로 잘 섞이는 유니크(Unique)한 음색을 가진 [비밥 앨토]의 매력을 충분히 맛보았다.
Music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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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 호보켄…프랭크 시나트라 '마이 웨이(My Way)'
프랭크 시나트라(1915-1998)는 미국 뉴저지 호보켄 출신의 가수이자 영화배우다. 그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장 위대한 가수들 중 한 사람이었다. 호보켄 시는 허드슨 강을 사이에 두고 뉴욕 맨해튼과 마주 보고 있다. 이 도시는 스티븐스 공과대학을 비롯해 다양한 역사와 문화적 유산들, 레스토랑과 바, 공원 등이 있어 방문객들이 많다. 특히 허드슨 강변을 따라 프랭크 시나트라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호보켄 시 당국은 2021년 시나트라 탄생 106주기를 맞아 공원 입구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나는 미국 뉴욕을 여행하면서 색소폰 버스킹을 위해 이 공원을 방문했다. 글·사진 l 박형섭 부산대 인문대 불문과 명예교수/색소포니스트 hsubpark@pusan.ac.kr 2023년 4월 초 뉴저지의 날씨는 화창한 봄날이 무색할 정도로 바람이 서늘했다.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 사이로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 벚꽃 이파리들이 흩날렸다. 난 시나트라 동상 앞 벤치에 앉아 확 트인 강 건너 맨해튼을 바라보았다. 파노라마처럼 영상들이 스쳐 갔다. 초현대식 고층빌딩들, 다양한 피부의 인종들, 각양각색의 자동차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극장 들, 베이커리와 카페, 레스토랑들, 패션을 창조하는 젊은 뉴요커들 등 지난 며칠 동안 맨해튼에서 보았던 이미지들과 함께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빙그레 웃고 있는 시나트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처럼 중절모에 멋진 슈 트 차림으로 가로등에 살짝 기댄 채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 뛰놀던 먼로 거리를 향해 <마이 웨이>를 흥얼거리고 있는 듯했다. 그는 <마이 웨이> 노랫말이 새겨진 돌판 위에 서 있었다. ▶칼럼 전문은 월간색소폰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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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ssay] 파리 몽마르트르 물랭루즈, 봄날은 간다
파리의 봄 날씨는 대체로 맑고 선선하지만 일기는 변덕스럽다. 맑은하늘에 불시에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뿌리고 지나간다. 자주 내리는 비 덕에 공기는 매우 투명하다. 이렇게 대지를 적시는 봄비는 생명체를 일깨운다. 가로수와 정원에 푸릇푸릇 새싹들이 돋는다. 센 강의 부둣가를 걷는 산책자도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도 분주하다. 아름다운 봄날이 간다. 나는 파리지앵처럼 외투를 걸치고 거리로 나선다. 오늘은 파리 북쪽 피갈 몽마르트르 물랭루즈 앞에서 버스킹을 할 것이다. 몽마르트르 지역은 잘 알려진 명소이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특히 이 지역은 색소포니스트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근처에 색소폰 명가 반도랭(Vandoren) 본사가 있고, 색소폰 발명가 아돌프 삭스가 잠들어 있는 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프렌치 캉캉과 함께 샹송 가수들이 활동했던 카바레 물랭루즈가 있으니 파리를 여행한다면 빼놓을 수 없다. 몽마르트르는 20세기 초반까지 세탁소와 빨래터가 밀집해 있었다. 가난한 화가들은 이 동네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들 가운데 피카소, 모딜리아니, 르누아르, 반 고흐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도 있다. 그들은 이곳의 일상적 풍경에 매료되어 화폭에 담았다. 그 그림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가 그중 하나다. 무명의 돈 없는 화가들이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팔면서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에 화가들이 정착하기 시작한다. 세탁선(Le Bateau Lavoir)은 버려진 선술집을 화가들이 개조하여 아틀리에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입체파의 시작을 알린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도 당시 이곳에서 창작되었다. 바토 라부아르와 테르트르 광장은 오늘날 관광 객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몽마르트르의 명소가 되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오르는 르픽(Lepic) 거리 입구에 물랭루즈가 있다. 물랭루즈는 프랑스어로 Moulin Rouge, 빨간 풍차란 뜻이다. 1889년 문을 연 카바레로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건물 지붕 위에 커다란 빨간 풍차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고급식사와 함께 스펙터클을 즐기려는 방문객은 예약이 필수다. 무엇보다도 프렌치 캉캉의 화려한 무대를 즐길 수 있다. 조세핀 베이커, 프랭크 시나트라, 이베트 길베르, 잔느 아브릴, 에디트 피아프 등 이름난 가수들이 활동했다. 후기인상파 화가 툴루즈 로트랙은 물랭루즈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아카데미작품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영화 〈물랭 루즈〉도 바로 여기서 제작되었다. 나는 물랭루즈 앞 광장에서 색소폰을 꺼내든다. 지하철 피갈 역 출구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온다. 오가는 인파 속에서 연주를 하려니 신경이 쓰인다. 즉흥적인 암보 연주는 연주자의 집중력이 필수다. 난 소음 때문에 망설이다가 K-pop 〈봄날은 간다〉를 연주했다. 심호흡을 하고 마우스피스를 깊이 물었다. 색소폰 소리가 울리자 사람들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평소대로 노래의 마지막 프레이즈를 끝냈다. 나도 모르게 감흥에 빠져들었다. 우리 가요는 노랫말도 멜 로디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뜻대로 된 연주는 아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파리의 봄날에 어울리는 노래를 연주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언젠가 물랭루즈에서 혹은 파리의 공연장에서 한국가수가 K-trot로 심금을 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연주를 준비할 때부터 한 젊은 친구가 주위를 서성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스마트폰으로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난, “좋아요. 멋지게 찍어보세요.”라고 답했다. 그는 내가 연주를 마치자 웃으며 다가와 연주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영상을 틱톡에 올릴 거에요!” 거리 연주를 하면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몇 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이 노래를 연주할 때 있었던 일이다. 연주를 마치자 한 여성이 다가왔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연주를 들으면서 매우 슬프고 서정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어떤 내용의 노래인지, 제목은 무엇인지, 심지어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까지 물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면 서 유튜브 채널에서 다양한 한국의 노래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버스커에게 대중의 반응은 큰 힘이 된다. ▲프렌치 캉캉 이미지(물랭루즈 입구) ▲반도랭 전시장 ▲반도랭 본사 나는 색소폰 명가 반도랭 본사로 향했다. 물랭루즈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색소폰이나 클라리넷 연주자라면 반도랭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반도랭은 클라리넷 연주자 외젠 반도랭이 1905년 설립했다. 이 회사는 클라리넷과 색소폰 리드, 마우스피스, 액세서리에서 빠르게 선두주자가 되었고, 오늘날 생산량의 90퍼센트를 100개 이상의 나라에 수출한다. 회사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니 1층에 리드, 마우스피스, 리가춰 등의 진열대가 보였다. 악기 종류별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설명을 곁들여놓았다. 반도랭의 노하우는 전 세계 과학자들과 음악가들의 협력으로 완성되었다. 연구와 실험을 거쳐 생산된 새 제품들은 생산과 동시에 공개된다. 연주자들은 새로운 제품들을 반도랭 시연실에서 테스팅할 수 있다. 나는 알토색소폰 반도 랭 마우스피스 Java55, 녹색자바리드 3호, 옵티멈 골드리가춰 등을 셋팅해 시연했다. 반도랭 리드의 원료인 갈대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지역의 갈대밭에서 재배된 100% 천연식물이다. 블루보사 리듬 몇 소절을 연주해보니 과연 반도랭 제품답다.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위한 스페이스 파티션과 강의실을 포함한 스튜디오도 구비되어 있다. 이런 스튜디오는 유럽은 물론 일본(도쿄), 미국(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북경)에도 있다고 한다. 이 회사는 역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아들 로버트 반도랭에 이어 현 회장인 버나드 반도랭으로 승계되었다. 나는 근처 몽마르트르 공원묘지로 향했다. 이 묘지는 파리 18구에 있는 묘지로 페르라셰즈, 몽파르나스 묘지와 함께 파리의 3대 묘지 중 하나이다. 에밀 졸라, 에드가 드가, 니진스키, 스탕달, 베를리오즈등 예술가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각각의 무덤에는 묘지 주인의 개성과 삶을 보여주는 독특한 조각과 동상들로 장식되어있다. 아돌프 삭스의 묘는 6구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석재로 지은 가족 납골당에 잠들어 있다. 납골당 오른쪽 벽에 색소폰 그림과 함께 삭스에 대한 정보가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벨기에 디낭에서 1814년 11월 6일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1894년 2월 4일 죽다.’ 그와 절친했던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가 베를리오즈의 묘도 몇 구역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삭스가 파리에서 색소폰 특허를 등록하고 파리 음악계에 입문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람이다. 그의 도움으로 색소폰은 프랑스 군악대에 편성되어 베이스 음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삭스는 파리 악기제조자들의 견제와 소송에 휘말려 파산하고 말았다. 나는 발명가 삭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삭스의 묘를 떠나면서 “벨기에 디낭의 삭스박물관도 방문해야지”하고 생각했다. 울창한 숲속의 묘지를 산책하다 보면 유명인들의 묘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툴루즈 로트랙의 그림에 등장했던 프렌치캉캉 댄서 라 글뤼의 묘도 눈에 띄었다. 물랭루즈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이 저세상에서도 물랭루즈 근처 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지금 여기서’ 대화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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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ssay] 간몬해협, 비에 젖은 색소폰
일본은 홋카이도·혼슈·시코쿠·큐슈 등 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그 가운데 혼슈와 큐슈 사이의 바다가 바로 간몬해협(関門海峡)이다. 이 해협을 향해 두 항구도시가 마주 보고 있다. 바로 혼슈의 남쪽 끝 시모노세키(下関)와 큐슈의 북쪽 끝 모지(門司)다. 간몬해협은 두 포구의 지명에서 한 글자씩 취해 만들어진 명칭이다. 이 두 도시는 역사적 장소로 유명하며 간몬교와 해저터널로 연결되어 쉽게 왕래할 수 있다. 현수교로 설계된 간몬교는 1973년 11월에 개통됐다. 시모노세키는 일본 국내 교통요지일 뿐 아니라, 한국과 교류하는 중요한 창구이다. 특히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여객선 부관페리는 매일 운행되고 있다. 시모노세키는 예부터 일본의 거점 역할을 하는 항로이다. 애도 시대부터 기타마에부네의 기항지로 번창했고, 메이지 시대 이후 대조선(朝鮮) 무역 중심지였다. 우리에겐 한양을 출발한 조선통신사가 부산에서 뱃길 따라 대마도, 시모노세키를 거쳐 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은 그 자체로 대규모의 문화공연이었다. 앞에는 조선의 악대가 장엄한 곡을 연주하고 뒤에는 조선의 명물인 마상재 공연이 펼쳐졌다.”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아카마 신궁도 시모노세키 부두에 인접해 있었다. 무수한 조선의 문화예술인들이 머물다 간 곳, 일제 식민지 시절 고통을 당하던 우리민족에게 애환이 서려 있는 부두에서 비바람 부는 간몬 해협을 바라보니 격한 감정이 일었다. 나는 2023년 1월 12일부터 3일간 후쿠오카 지역을 돌아보았다. 시모노세키와 모지코를 방문했을 때, 겨울비와 함께 세찬 바닷바람이 불었다. 색소폰 버스커에게 우천은 최악의 날씨다. 비 오는 날에는 거리공연을 할 수 없다. 소음이나 바람은 연주에 장애요인이기는 하지만, 연주 그 자체를 가로막지는 않는다. 나는 오히려 적당히 부는 바람을 선호하기도 한다. 색소폰 연주를 스마트폰 영상으로 찍은 후 재생하면 때로 바람소리가 연주음과 어우러져 묘하게 매력적으로 들린다. 음향 효과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버스킹의 현장성과 생동감을 준다. 물론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녹음하는 작업은 다른 차원이다. 이 경우 외부 소음은 단연 피해야 할 대상이지만, 거리 연주는 현장음을 적당히 활용하는 게 더 멋스럽다. 비가 좀 잦아들면 색소폰을 연주할 셈이었다. 비에 젖어 축축한 부둣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이런 날씨에 연주가 제대로 될까 걱정되었다. 나의 연주 여행은 대부분 낯선 곳에서 즉흥적이고 즉각적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부두에서 바라본 간몬교의 풍경,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 해협을 질러가는 다양한 배들의 모습은 여행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좋아! 해협을 향해 힘차게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자!” 나는 일본열도 어디서나 색소폰 버스킹을 한다면,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가장 어울리는 K pop일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 노래는 김연자, 계은숙 등 일본에서 활동했던 한국 가수들 덕분에 일본에서도 인기곡에 속한다. 일본 기네스북에서 “리메이크가 가장 많이 된 외국 가수의 노래”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다. 일본 가라오케의 한국가요 인기 순위에서 지금도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해협을 통과하는 부관페리의 승객들을 떠올리며 힘껏 숨을 내지르며 마우스피스를 깨물었다. 연주가 끝나고, 가라토(唐戶)시장을 거쳐 해변식당에서 토라후쿠(복어) 사시미를 맛보았다. 여기는 복어의 본고장이었다. 일본 복어생산량의 80%가량이 이곳을 거쳐 유통된다고 한다. 곳곳에 복어 동상과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가라토시장은 부산의 자갈치시장과 같은 곳이다. 특히 초밥 마니아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한국의 어시장에서 볼 수 있듯 각종 해산물과 수산 가공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나는 식사 후 모지항으로 이동했다. 이 도시는 과거 국제무역항으로 매우 번성했었다. 지금의 모습은 옛날 화려했을 때를 재현한 것이다. 그래서 모지코레트로(門司港レトロ)라는 이름이 붙었다. ‘레트로Retro’는 일본식 영어 표현으로 ‘복고풍’이란 뜻이다. 모지코 역에서 해협으로 통하는 길목에 붉은 벽돌의 옛 오사카 상선 빌딩이 있다. 그 옛날 간몬해협을 누비던 대형 선박들의 본부인 것이다. 그 옆에 미츠이 구락부(클럽)가 있는데 유럽풍의 오래된 건물이다.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 박사 부부가 모지항을 방문했을 때, 여기에 묵었다고 한다. 지금도 정문에 ‘미지코 미츠이 구락부’라는 대리석 문패가 붙어있고, 아인슈타인 박사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모지항에는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후 5시를 넘기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건물마다 불빛이 반짝이고 고풍스러운 부둣가 가스등이 서서히 밝아왔다. 일렁이는 바닷물에 비친 모습은 움직이는 풍경화였다. 거기에 어렴풋이 내 모습이 보이자 난 순간 넋이 나가 나르시시스트가 되었다. 어스름한 항구, 비바람을 맞고 있는 이방인은 금세 음유시인이 되었다. “그렇지, 지금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는 〈적과 흑의 블루스〉야”라고 중얼거리며 악기를 꺼냈다. 이 노래는 일본의 츠루디 코지의 히트곡으로 미국의 테너 색소포니스트 실오스틴이 일본에서 재즈 스타일로 연주해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연주곡 〈적과 흑의 블루스〉는 경음악 음반으로 발매되어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다. 블루스 특유의 끈적한 리듬이 색소폰 선율과 잘 어울린다. 나의 빗속 연주는 초저녁 적막한 모지항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엔카이니 듣는 이가 있었다면 마음속으로 따라 불렀으리라. 아마추어거리 연주자는 이런 상상에 빠질 때 가장 행복하다. 버스킹, 길거리 연주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퍼포먼스는 행위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이나 내용을 구체적으로 육체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연주 퍼포먼스는 육체로 만들어내는 공간의 시이다. ‘때와 장소’, 즉흥성과 순간성이 소리와 함께 고스란히 기록된다. 이 경우 돌발적 상황이 해프닝의 주요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아마추어 색소포니스트의 버스킹은 언제나 자유로운 플레이로 끝난다. 개인적 삶의 체험은 그렇게 우주 속에 지나가는 바람처럼 새겨질 것이다. 이번 일본 여행에서 비에 젖은 색소폰은 하이라이트다. 훗날 영상을 본다면 당시의 생생한 느낌이 되살아날 것이다.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시모노세키와 모지코, 이 지역은 우리에겐 가슴 아픈 곳이다. 일제의 강제 노역으로 한 맺힌 과거가 스며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일 두 나라 사이에 여전히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다. 그러나 가장 가까워야 할 이웃이기에 미래지향적인 해법이 나오리라 희망한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만남과 왕래가 그날을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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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ssay] 마조레 광장 Piazza Maggiore과 〈광화문 연가〉
이탈리아 동쪽 리미니 해변에서 발사믹 명가 레오나르디(1871)가 있는 모데나로 향하던 중 잠시 볼로냐에 들렀다. 볼로냐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대학이 세워진 교육·청년·자유의 도시다. 색소폰 버스커로서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옛 고고학적 분위기의 도시에서 k-pop을 연주하고 싶었다. 시 전체가 오래된 붉은 건물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또한 볼로냐는 도시 이름을 딴 볼로네제 파스타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나는 볼로냐에 도착하자마자 시내 중심 마조레 광장으로 향했다. 유럽의 대도시는 중앙광장 주변에 관공서, 성당, 대학, 시장과 백화점 등이 운집해 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다. 광장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의 포룸forum, 중세 교회 앞 광장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시민들은 휴식 혹은 식사하면서 이곳에서 여유롭게 머문다. 노천 바에서 커피나 와인을 마시는 시민들 모습이 평화스럽다. 책을 읽거나 대화하는 사람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모습도 흔하게 보인다.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객이 우선 광장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마조레 광장에는 평일 오후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잠시 앉아 쉬기도 했다. 나는 이탈리아 국기, 유럽연합기, 볼로냐 깃발이 펄럭이는 시청을 마주보고 광장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 누구도 내가 색소폰을 꺼내 세팅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옆에 앉아 책을 보던 신사가 힐끗 곁눈질을 했다. 마치 색소폰을 연주하면 들어줄테니 마음껏 연주해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무슨 노래를 부를까 잠시 생각했다. 불현듯 서울의 광화문광장이 떠올랐다. 지금 여기가 시민들이 모이는 광장이 아니던가. “그렇지 이문세의〈광화문 연가〉를 연주해보자.” 이국땅에서 한국의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은 의미 있어 보였다. 더구나 케이팝발라드이니 큰소리로 연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광화문 연가〉를 앉은 자리에서 나지막하게 연주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역시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푸른 하늘과 바람, 성당 꼭대기의 십자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랫말이 이곳의 분위기에 어울렸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들과 사라진 사물들, 성당 주변에서 사랑을 속삭였을 연인들, 개와 고양이, 비둘기들… 나는 이들을 관객으로 여기고 지긋이 눈을 감고 연주했다. 광장의 사람들이 마치 청중이라도 되는 듯이 “이봐요, 우린 당신이 연주하는 노래를 모르오. 하지만 감미롭게 들리네요. 칸초네도 한 번 연주해줘요.”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여러분이 청한다면 한 곡 부르지요.”라고 속으로 화답했다. 나는 야외 공연이기라도 하는 듯이 광장 한복판으로 나아가 〈리멘시타〉를 힘껏 연주했다. 이탈리아 산레모가요제 입상곡으로 도렐리, 밀바가 불러서 크게 사랑받았고, 한국에서는 번안가요로 한경애, 배호가 불러 역시 히트한 노래다. 이탈리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곡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리멘시타〉와 함께 〈오 솔레미오〉를 여행하기 전부터 열심히 연습했다. 물론 머릿속으로 암보했다고 길거리에서 뜻대로 연주되지는 않는다. 연주자는 누구나 악보 기억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무대에 선다. 버스킹은 퍼포먼스이기 때문에 상황에 매우 민감하다. 예기치 않은 주변의 소음에 박자, 음정을 놓칠 수 있다. 실수는 언제나 가능한 일이고, 그 실수를 요령껏 극복하는 수완도 묘미다. 이때 버스킹 경험은 매우 유용하게 작용한다. 연주가 중단된다면 프로든 아마추어든 연주자로서 최악이다. 멜로디는 물론, 노래의 조성에 따른 스케일 패턴을 연마해 두어야한다. 이것은 즉흥연주에 필수적이다. 비록 연주 중 일부 틀려도 주 멜로디와 조화를 이루며 곡이 흘러가면 다행이다. 완벽한 연주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수를 인식했다면, 그 다음 연주에서 동일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게 상책이다. 아마 본의 아니게 내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모른 척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귀에는 “오, 칸초네를 연주하다니, 반갑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색소폰 선율은 광장 하늘 저 높이 울려퍼졌다. 노천카페와 레스토랑, 시장상인들,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성당이나 관공서 근무자들 등 주변의 사람들이 흥얼거렸을 것이다. 마조레 광장 입구에 넵튠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삼지창을 들고 있는 넵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 즉 바다의 신이다. 이 삼지창은 볼로냐 시의 상징이자 이탈리아 슈퍼카 마세라티의 엠블럼으로 쓰인다. 볼로냐에서 창업한 고급차 메이커 마세라티의 자부심이 거기 새겨져있다. 시청 옆 건물에는 피아트계열의 알파로메오 자동차 광고판이 보였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알파로메오 등 고급 자동차 브랜드를 보유한 콧대 높은 나라 아니던가. 나는 광장을 벗어나 볼로냐 대학으로 향하는 잠보니 거리로 들어섰다. 이 도시는 포르티코(Portico)로 유명하다. 포르티코는 건물을 확대해 지붕 있는 기둥을 세운 회랑을 말한다. 시내 거의 모든 건물에 포르티코가 있다. 즉 어디서나 기둥이 늘어선 길, 지붕 있는 보행로를 볼 수 있다. 이 길의 높이는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도록 2.66m로 통일했다고 한다. 볼로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포르티코를 보유한 도시다. 시 가장자리에서 마돈나 디 산 루카 수도원에 이르는 포르티코의 길이는 18km이다. 비와 눈, 햇빛을 피할 수 있으니 보행자 천국인 셈이다. 볼로냐가 이처럼 포르티코의 도시가 된 것은 볼로냐 대학과 관계가 있다. 그 옛날 유럽 각지에서 온 유학생들 수가 많아지자 시내에 방이 부족했다. 그래서 인도 위에 기둥을 세워 포르티코를 만들고 위층은 학생 기숙사로 사용했던 것이다.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 벽에 '모든 학문이 퍼져 나간 곳 Alma Mater Studiorum'이라는 구절이 씌어있었다. 볼로냐대학이 교육기관으로 공식 문서에 등장한 것은 1088년이다. 유럽에서 고대 그리스 지식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 가운데 하나다. 그 덕에 일찍 인문학이 꽃피게 되었고, 법학, 의학, 철학, 신학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대학은 교회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최초로 인체 해부실험을 감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 〈신곡〉의 단테, 〈우신예찬〉의 에라스무스,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 등이 이 대학 출신이다. 특히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기호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는 교수로 재직했다. 공간, 혹은 장소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과 함께 추억 속의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볼로냐에 사는 사람들, 이 도시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광장은 저마다의 이미지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이곳은 지난날 예술과 지성을 꽃피운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 광장과 골목, 카페에는 아직도 신화들이 꿈틀거린다. 학문을 좇던 중세 젊은이들의 발걸음, 근대와 현대의 사상가 및 예술가들의 지적 산물이 곳곳에 배여 있다. 나는 대학가 잠보니 거리를 걸으면서 “나의 노래가 볼로냐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아있기를 희망하며” 지성의 향기가 섞인 공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오늘날 볼로냐 시는 클래식부터 전자·재즈·포크·오페라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활성화되어 있다. 시민들과 방문객들은 언제든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볼로냐는 그 공로로 2006년 유네스코 ‘음악의 도시’로 선정됐다. 이 국제적인 음악의 도시에서 K-pop은 물론 한국의 전통 음악도 더 자주 울려 퍼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