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1-30(목)
 


한국 6,70년대에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곳의 풍경은 어땠을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어떻게 음악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빛바랜 듯 서글픈 그 시절에 대한 감상은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열정이었고, 꿈이었고, 사랑이었기에 가슴 아픈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전쟁과 해방을 겪으며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그로 인해 피어난 미8군에서의 한국 대중가요 전성기는 우리 음악의 뿌리이자 우리 음악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김대우(63) 선생은 국내에 클래식 색소폰 지도법을 처음 도입한 색소포니스트로 2005년부터 2019년까지 KBS관현악단장으로 활동하며 약 2천 2백회의 공연을 지휘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트럼펫 연주음반을 발표한 작곡가 겸 트럼피터 김인배 선생의 장남이다. 김인배 선생은 연주인으로 시작해 KBS, TBC 라디오 악단장, KBS 관현악단장을 거치는 동안 〈빨간 구두아가씨〉 〈보슬비 오는 거리〉 등을 비롯해 4백여 곡을 작곡하고, 2천5백여 곡을 편곡했다.

김대우 선생은 1996년 한국색소폰협회를 만들어 외국과 교류하며, 한국색소폰앙상블을 조직해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는 2003년부터 ‘Selmer Nonaka’와 계약해서 ‘셀머 아티스트’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는 ‘Selmer Nonaka’에 원활한 악기공급과 악기수리를 위해 한국 지사를 운영할 것을 권했다. 서울 서초동에 ‘노나카 코리아’를 운영하고 있으며 ‘Selmer Nonaka’에서 악기수리학교를 졸업한 두 명의 노나카 직원이 상주중이다. 김대우 선생과 그의 ‘노나카 코리아’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기교육

김대우 선생은 KBS 관현악단장인 부친 김인배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여러 악기를 다루며 작곡과 편곡을 했다.

기자가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는지 묻자, 김대우 선생은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줬다. “아버지는 많은 곡을 편곡하셨어요. 처음엔 오픈릴 테이프(open-reel tape 폐쇄된 작은 통에 안전하게 담겨 있는 카세트테이프와 달리 녹음기의 릴에 직접 장착하는 테이프로 1950~1970년대에 특히 많이 사용했음)로 편곡을 하셨어요. 그 후 전축이 나와 LP(분당 33회 회전으로, 한 면이 연주되는 데 약 25분이 걸리던 옛날 전축판)로 곡을 들으면서 편곡 작업을 하셨죠. 곡을 듣다 원하는 부분을 다시 들으려면, LP 전축의 바늘을 정확히 놓아야 했죠. 아버지가 편곡 작업을 하실 때, LP 옆에서 보조를 했습니다. 덕분에 새로운 음악을 많이 들었죠. 아버지가 곡을 듣다가 ‘다시’라고 말씀하시면 제가 전축 바늘을 그 자리에 놓곤 했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 6살. 자연스레 음감을 익혔습니다. 음악은 저와 늘 함께했죠.”

김대우 선생은 손가락을 다쳐서 피아노를 칠 수 없었고, 관악기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모님은 음악전공을 반대했습니다. 아버지는 낮에는 방송국에서 저녁에는 밤무대로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셨어요. 자식이 힘든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저는 TV에서 이봉조 선생님의 색소폰 부시는 모습을 보고 색소폰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음악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원하는 것을 사주겠다고 말씀하셨고, 저는 색소폰을 갖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색소폰과의 인연

“아버지가 그 당시 고가였던 ‘셀마’ 테너색소폰을 사 주셨어요. 부산으로 테너색소폰 2대가 들어왔습니다. 그 중 한 대가 이봉조 선생님의 악기였고, 남은 한 대는 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에 색소폰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당시 유명했던 ‘씰 오스틴’의 〈대니 보이〉 음반을 듣고 악보로 옮겨 독학으로 색소폰을 연주했습니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있으면, 음악소리만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차라리 저한테 LP바늘을 놓으라고 하지 말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버지 몰래 고등학교 밴드부에 들어갔고, 트럼펫을 불다 색소폰으로 전향하고 마칭밴드에서 긴 지휘봉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에 부모님을 설득해서 음악을 전공하게 됩니다. 작곡과 바순을 교수님께 레슨 받으며 익혔습니다. 바순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경희대학교 콩쿠르에서 1등을 수상하며, 경희대학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색소폰 1세대

“1960년대 미8군에서 활동하셨던 연주인들이 재즈와 당시 유행했던 대중음악(트로트)을 접목해서 새로운 가요장르를 만들었습니다. 번안가요(가락, 화성, 리듬은 외국 곡에서 차용하고, 가사는 우리말로 바꾸어 부르는 가요) 역시 그 당시에 유행합니다. 간단한 반주로 듣던 음악이 점차 화려해지면서 저는 새로운 음악에 빠져들었어요.”

김대우 선생이 색소폰을 배우던 시절, 국내 색소폰 연주자 중에 색소폰을 전문으로 배운 연주자는 없었다. “색소폰 1세대 연주자인 이봉조, 길옥윤 선생님은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저는 색소폰을 독학으로 익혀서 객관적인 나의 색소폰 연주 실력이 궁금했습니다. 재즈색소폰 연주자는 이정식(동명이인), 김수열 선생님이 계셨어요. 김수열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나한테 배우는 것 대신 재즈 이론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며 이판근 선생님을 소개시켜주시기도 했어요.


대학시절 선배의 권유로 밤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색소폰을 연주할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제 연주에 관객은 즐거워했고, 전문 연주자들과 합주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김대우 선생은 색소폰을 배우는 것에 갈급이 났다. 색소폰 1세대 연주자는 독학으로 색소폰을 익혀서 누군가를 지도하는 것에 부담을 갖고 있었다.

재즈 VS 클래식 (진로)

김대우 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1985년~1988년 대우브라스밴드 지휘자로 활동한다. 음악의 벽을 느끼며 견문을 넓히고자 독일로 유학을 간다. “처음 독일에서 뒤셀도르프 음대 선생님께 사사 받았습니다. 서울시향 트럼펫 연주자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간 친구가 독일로 여행와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네덜란드는 TV에서 다양한 연주공연과 재즈가 방송되며, 길거리에서 버스킹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저의 음악적 성향은 독일보다 네덜란드와 잘 맞는다고 조언했습니다. 친구를 따라 네덜란드로 옮겨갔죠. 네덜란드 로테르담 음악원은 색소폰 전공이 재즈와 클래식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외국 유학생 담당교수인 ”에리카 드 바이스(Erica DeWijs) 교수님께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조언하셨고, 6개월 동안 재즈와 클래식을 번갈아 배우며 진로를 고민했습니다. 에리카선생님께서 제가 한국에서 지휘했던 경험을 말씀하시며, 클래식 색소폰을 전공하면서 지휘를 전공해서 한국 대학교에서 색소폰 학과가 생길 것을 준비하라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래서 김대우 선생은 지휘와 클래식 색소폰을 복수 전공한다.


마스터 클래스

김대우 선생은 유학을 가서 대학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지만, 세계 최고의 재즈나 클래식 연주자의 마스터 클래스 강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트럼펫 연주자 Wynton Marsalis(윈튼 마샬리스)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들었던 말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윈튼 마샬리스는 “나는 이제 틀에 박힌 연습을 하는 것이 싫다”고 말했어요. 아마도 1등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개인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하는 것에 지쳤으리라 생각합니다. 김대우 선생은 그 강연을 듣고, 대중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유학 중 Tom De Vette(톰 드 베트) 교수님과 함께 1991년 최초로 클래식 색소폰 공연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과 제주 문예회관 대극장, 부산 KBS홀에서 대규모로 진행했다.

“어떻게 보면 모험과도 같았어요.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클래식색소폰이 무엇인지 몰랐고, 색소폰은 재즈나 팝, 가요를 연주하는 악기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음악 전공자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였죠. 클래식색소폰이라는 분야를 한국에 알린다면 귀국할 무렵, 대학에서 색소폰학과를 개설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자는 최초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저는 1991년도에 최초로 클래식 색소폰 공연이 개최됐다는 사실이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늦었다고 생각해서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김대우 선생은 귀국 후 교수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세계 최고의 연주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서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색소폰 앙상블을 만들어 국내외 공연도 하며, 해외 유명연주자 초청 콘서트,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했다. Arno Bornkamp(아르노 보른캄프), Phillipe Portejoie(필립 폭드주아), Nicolas Prost(니콜라스 프로스트), Sugawa Nobuya(스가와 노부야) 등을 초청해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했다.

김대우 선생은 “그 일들이 색소폰전공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고 해외 유명 대학교수들도 한국인유학생들을 반기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색소폰 학과 개설

김대우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강남대학교 색소폰학과와 백제예술대학교에 출강하게 된다.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시작으로 서울과 지방의 대학들도 색소폰학과가 신설되면서 출강하게 된다. 대학교에서 색소폰 학과가 생기면서 서울예술고등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계원예고, 안양예고 등도 출강 요청을 받아 대학교 14곳과 고등학교 4곳 총 18개 학교에 출강한다.

김대우 선생은 학생들에게 “나는 색소폰 1세대로 색소폰을 전파하는 역할로 대학교에서 강좌를 신설했다. 너희는 색소폰 2세대로 색소폰을 발전시키는 일을 해야 하고, 외국의 연주자들과 대등한 실력을 쌓을 수 있게 노력해야 된다”고 말했다.


방송악단의 변화

김대우 선생은 대만, 북경연주 외에 KBS열린음악회, KBS예술극장, KBS국악관현악단과 미국 UN공연 등으로 KBS와 인연이 돼 2005년 공채로 KBS관현악단장이 된다.

“취임 후 모든 악보를 컴퓨터로 작업해서 악보를 보기 수월하게 했습니다. 또한 지휘용 풀 스코어(Full Score)를 만들어 파일로 보관했습니다.

2012년 KBS교향악단이 법인화되면서 관현악단으로 전직한 단원들이 많아지면서 연주력도 향상 됐죠. 한국을 대표하는 연주단체인 KBS교향악단단원들의 합류로 특히 현악기의 풍성한 사운드로 클래식연주부분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늘어난 인원으로 객원연주자들로 대신하던 파트를 단원들로만 연주했습니다.

요즘 가요, 특히 K팝이라 불리는 아이돌의 음악은 다양한 리듬과 전자악기로 구성돼 오케스트라로 포현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편곡자와 협의해서 가능한 원곡의 분위기를 살려서 성악가, 뮤지컬가수, 국악인, 대중가수 등 모든 출연자가 만족할 만한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음악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출연진은 손님이고, 악단은 주인으로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이 최선을 다해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브라질 상파울르 오케스트라(가요무대 브라질공연), 칭다오 시향(한중일 합동공연), KBS교향악단, 광주시향, 성남시향 팝스콘서트 객원지휘자로 활동한 김대우 선생님께 악단에 많은 단원들과 어떻게 소통했는지 묻자, “음악은 같이 만들어가며 연주하는 것으로 제일 중요한 것이 소통입니다. 단원은 음악을 전공한 자부심을 가진 연주자로 존중합니다. 지휘자라면 모든 악기를 이해하고 잘못된 악보나 연주할 수 없는 악보도 편곡해서 연주자들의 기량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뒷모습에 치중해 음악을 만들지 못하는 지휘자는 연주자들과 소통할 수 없다”고 답했다.


좋아하는 연주자, 예술적 감성에 영향을 준 사람

김대우 선생은 초대 셀머 색소폰 연주자 Mercel Mule(머르셀 뮬)을 좋아하는 연주자로 꼽았다. “Mercel Mule은 클래식 색소폰과 재즈연주자이며 지휘자로 최고 명기로 손꼽히는 셀머 색소폰 Mark6 모델을 탄생시켰습니다. 지금도 그가 남긴 최초의 클래식색소폰음반을 들으며 감동받고, 색소폰연습곡들은 아직도 교과서처럼 교재로 사용됩니다.

Paul Mauriat(폴 모리아)는 작곡가, 편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 1975년 12월24일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공연한 ‘폴 모리아’ 악단의 연주를 듣고, 장래에 저런 음악을 하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김대우 선생은 자신을 진정한 딴따라라고 말했다. 딴따라는 국어사전에 연예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명시돼 있다. “어릴 때 아버지 직업을 묻는 통신문이 있었어요. 거기엔 음악가라는 직업란이 없었죠. 그래서 아버지께 물었는데, ‘너는 딴따라 김씨 2대다’라고 답해주셨어요. 그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저는 딴따라 김씨가 있는 줄 알았어요. 나이 들면서 딴따라라는 말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요즘은 연예인이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고 오히려 동경하는 시대입니다. 음악도 대중가수나 실용음악이 대세죠.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예술인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우 선생님은 자신은 제자와 모든 음악인에게 진정한 딴따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대우 Profile

 

 - 경희대학교, Rotterdam Conservatoriun 졸업

 -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 등 출강

 - 색소폰음반(지구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외 My Way)

 - 한국색소폰 협회장

 - 한국색소폰 앙상블 대표

 - KBS관현악단장,예술단장 역임

 - 색소폰교본(현대음악출판사)

 - 현) 김대우 관현악단장

 - Selmer Saxophone 홍보대사

 - 한국 교정학회 이사

 - 법무법인(오늘) 고문

 

(월간색소폰)박현주 기자= msp@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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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흩어진 기억을 찾아서] 김대우 색소포니스트가 말하는 그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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